"전문인 시대 아닙니까. 학력 파괴는 더 이상 중요한 얘기가 아니지요"

서울 힐튼호텔 박효남 조리이사.

올해초 인사에서 임원 반열에 올랐다.

그의 승진은 직종이 조리사라는 것부터 색다르다.

하지만 그가 스폿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이제 38세에
불과한데다 고졸 출신이라는 점.

학력파괴 연공서열파괴 직종파괴의 3박자를 다 맞춘 첫 승진 케이스다.

대우그룹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철저한 프로의식".

출발부터가 그랬다.

그가 요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경동고등학교 3학년 시절.

78년도다.

"공부를 잘하진 못했어요. 하루는 종로 5가에 있던 수도요리학원 앞을 지나
는데 이거다 싶대요. 바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남성들이 요리학원에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다.

간혹 있어도 떳떳하게 학원문을 드나들지 못하던 때.

그러나 자기 직업을 갖기 위한 학습에 떳떳치 못한 것이 오히려 이상
했단다.

남들 같으면 "사내놈이 뭐 할게 없어 요리사냐"며 호통을 쳤을 부모님도
선뜻 학원비를 대줬다.

그때 기준으로 따지면 박 이사는 물론이고 부모들도 "이상한 사람"들이다.

3개월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을 다닌 그의 첫 직장은 하얏트호텔.

요리학원 하숙정 원장이 추천해줬다.

하얏트호텔 양식당에 근무하면서부터 그의 프로기질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남들보다 2시간 이른 새벽 5시에 출근했다.

"쫄병"이 "고참"들과 똑같이 출근해서야 뭘 배울 수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출근시간전에 끝냈다.

동기들이 뒤늦게 출근해 잡일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본격적인 요리사 수업을 받았다.

노력만큼 좋은 성장 비결은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외국인 조리장과 의사소통이 안되니 한계가 뻔히 보였다.

당장 코리아헤럴드학원으로 달려갔다.

외국인과 거리낌 없이 의사 소통을 할 정도라는 그의 영어는 그때 만들어
졌다.

그 덕분에 그는 하이얏호텔내 처음으로 문을 연 프랑스식당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사내 스카우트인 셈이다.

또 한차례 스카우트는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 된다.

오픈 준비중이던 힐튼호텔 총지배인 스미스씨가 몇 차례 그의 요리를
맛보더니 그에게 바다가재 요리법을 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83년 힐튼호텔로 자리를 옮겨 오픈멤버가 된다.

그는 86년 또 한차례 변신을 하게 된다.

프랑스 벨기에 등 본고장에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에서 해물요리로 가장 유명하다는 "라 디빌레" 등 수많은 레스토랑을
거치며 본토 조리법을 배웠다.

그는 배웠지만 흉내만 내지는 않았다.

또 하나의 성공 비결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프랑스식 요리를 끊임없이 개발해 냈다.

지난 94년 싱가포르 국제 요리대회에서는 프랑스 요리에 한국 간장을 섞어
독특한 맛을 만들어내 5개 부문 금상을 휩쓸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가 개발한 요리는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또 다른 성공 비결은 철저한 고객관리.그는 힐튼호텔 11개 식당을 총괄하고
있지만 주 근무처는 프랑스 식당인 "시즌즈"다.

이곳에 들렀던 고객은 빠짐없이 그의 PC에 기록된다.

"어느 손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누구는 어떤 소스를 즐긴다"는
식이다.

그 고객이 식당을 다시 찾으면 기록은 정확히 활용된다.

이곳을 찾는 고객이 한달에 2천5백명.

수만명의 입맛이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사업은 생각하지 않고 있지요. 다만 서양처럼 힐튼호텔 프랑스식당
에 제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 수 있는 날은 기다릴 겁니다"

"파워프로 박효남"의 작은 꿈이다.

< 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