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 일가 방북기"는 방북단 15명의 증언을 토대로 본사 기자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상영 KCC 회장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을 지칭합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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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다음날인 17일, 우리는 오전 내내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용순
위원장 등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전체회의를 가졌다.

회의내용을 공개하긴 어렵지만 회의 방식은 앞서 얘기한 것과 같다.

호방한 성격의 김 위원장은 웬만한 결정은 그 자리에서 내려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머지는 실무진들에게 맡겨졌다.

오후에는 민족경제협력연합회 회의실에서 실무회의가 열렸다.

음식 얘기 좀 해야겠다.

이날 오전 전체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이 바로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이다.

대동강변 옥류관은 북한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꿩 살코기로 낸 담백한 육수맛은 지금도 혀끝에 남아 있다.

우리는 평양에서 옥류관 말고도 숙소인 모란봉초대소, 고려호텔을 돌며
냉면 맛을 봤고 나중에 금강산에 오를 때 외금강의 한 식당에서도 냉면을
청해 먹었다.

하루에 두끼를 냉면으로 해결한 날도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형님(정주영 명예회장)이 귀환길 판문점에서 "맛있던
음식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냉면"이라고 선뜻 대답했던 것은
그만큼 맛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김치도 제맛이다.

어느 식당이건 김치와 깍뚜기 된장찌개 맛은 별미였다.

북한의 김치는 우리 것과는 약간 다르다.

우리 김치가 요즘와서 무척 매워졌지만 그곳은 김치는 별로 바뀌질 않았다.

맵지 않고 심심했지만 그게 원래 김치맛이다.

우리는 식사때마다 김치를 두세접시씩 더 시켜 먹었다.

연회 때도 우리는 김치맛에 매료돼 다른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정도다.

연회는 방북기간중 네번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연회가 끝날 무렵 다함께 부른 노래다.

우선 모두 "우리의 소원"을 불렀고 그 다음 북측 사람들이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를 불러줬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는 하나의 겨레,헤어져서 얼마나 눈물또한
얼마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감상이 남달라선지 무척이나 가슴에
와닿는 노래다.

워낙 노래가 좋아 금강산에 올라갈땐 안내원한테 부탁해 한 소절씩 따라
배웠다.

이젠 "잘있어요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라는 후렴구까지 다 부를
수 있다.

물론 테이프도 구해왔다.

우리 형제는 실무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양을 제대로 구경할
기회가 많았다.

만경대 김일성생가와 주체사상탑 당창건기념탑도 가봤고 그 많은 기념관도
대부분 들러보았다.

오후에는 평양교예극장에서 종합교예공연을 관람했다.

서커스 공연인데 끝난뒤 절로 기립박수를 치게될 정도로 놀라운 묘기였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공연이었다.

나중에 소년궁에서는 우리의 리틀엔젤스 것과 같은 공연을 보았는데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우리에게 친척들이 찾아왔다.

북한에 와서 처음 만나는 친척들이다.

형님은 그래도 조금은 알아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50년 넘게 내왕이 없던 친척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모란봉초대소를 찾아온 친척은 우리 형제와 같은 영자 항렬 다섯명이었다.

남자가 네명, 여자가 한명이었다.

처음엔 서먹했지만 역시 핏줄은 다른가 보다.

많은 얘기가 오갔다.

물론 집안 얘기가 중심이 됐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

아래 항렬, 그러니까 몽자 항렬의 이름이 남북 친척간에 상당수 겹친다는
것이다.

같은 이름이 많다는 얘기다.

서로 합쳐 살면 이런 일이 있을 턱이 없는데 말이다.

50년 단절된 세월이 4촌, 6촌의 이름을 같게 만든 셈이다.

평양에서의 이틀째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 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