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로 대한항공 801편이 괌 아가냐공항에서 추락한지 만 9일이 된다.

그렇지만 한꺼풀씩 벗겨질 것으로 기대되던 추락의 원인은 또다른
수수께끼를 던지며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마치 모든 가능성에 귀기울여 하는 탐정소설 읽어 내려가기에 비견되는게
이번 사고 조사다.

추론과 시나리오는 난무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조사단도 모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만 확답은 피해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카드는 블랙박스.

고도는 왜 낮아졌을까.

추락직전 조종사와 관제사간 대화중에 나왔다는 "썸씽 롱"의 의미는
무엇일까.

조사단은 이 모든 궁금증을 블랙박스 해독에 유보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15cmx50cm, 무게 11kg의 두꺼운 강철로 덮혀진 이 장치는 모든
비밀을 담고 있을까.

한미합동조사단은 12일 현재 블랙박스중 CVR의 1차해독을 했으나 소음이
많아 정확한 내용파악을 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설령 녹음상태가 양호해도 대화록이 비행경로와 꼭 상관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FDR을 해독한뒤 다시 CVR의 해독결과와 연관해서 원인 규명에
나선다.

여기에 컴퓨터시뮬레이션(모의비행실험)도 빼놓을 수 없는 조사방법.

미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영국 등 불과 몇개국에만 있는 블랙박스
판독기에는 해독장비와 함께 검증장비(시뮬레이션)가 꼭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여러 가설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블랙박스가 "참조"되는
셈이다.

결정적 단서가 블랙박스에서 속시원이 나오진 않는다.

어떤 항공기사고치고 명쾌한 사고원인이 규명된게 없는 건 이래서다.

지난해 추락한 미 TWA추락원인이 그렇고, 83년 대한항공의 소련영공 추락
사고에서도 블랙박스는 어떤 비밀도 속시원히 토해내지 못했다.

결국 블랙박스는 비밀을 푸는 열쇠가 아니라 감춰버리는 위장물이 되기
십상이란게 항공전문가들의 얘기다.

< 남궁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