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에 사는 홍경상씨(35).

지난해 여름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시각은 새벽1시.

파란색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순간 형곡동쪽에서 달려온
승용차에 치여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사고당한 순간 외워둔 차량번호는 "경북xx4587".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도망친 가해자를 잡을 수 없었다.

세차례 수술도 허사였다.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회사에는 사표를 냈다.

부인은 다섯살짜리 아들과 세살짜리 딸을 친정에 맡기고 파출부로 나섰다.

홍씨의 경우와 같이 뺑소니사고는 피해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개인의 인생을 짓밟고 가정을 파괴한다.

가해자를 찾겠다며 직장을 그만둔 가장, 사고를 당한뒤 살림을 날리고
이혼까지 당한 남편, 죽은 자식 생각에 실의속에 살아가는 어머니, 부모를
잃고 고아로 살아가는 아이들...

한 피해자는 "뺑소니는 살인보다 나쁘다"고 말한다.

소득 1만달러시대로 선진국을 바라보는 한국.

그러나 뺑소니사고는 늘어만간다.

지난해 발생한 뺑소니사고는 1만5천6백90건.

5년전의 2배다.

뺑소니범의 절반 가량은 잡히지 않고 ''태평하게'' 살아간다.

가히 "뺑소니천국"이다.

뺑소니운전사 검거율은 50%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사고가 나면 "도망치고 보자"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씨름선수인 이민영씨(가명)도 알려지지 않은 뺑소니범.

몇년전 울산에서 음주운전중 택시를 들이받고 도주했다가 붙잡혀
1천5백만원을 주고 합의해야 했다.

운전자들이 이씨의 경우를 그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한 뺑소니사고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경찰청이 9월말까지 일선 경찰서에 전담반을 편성해 뺑소니운전자를
끝까지 추적키로 했지만 그 성과는 미지수다.

주민의 제보가 없으면 검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교통시민협회 관계자는 이와 관련, "이 땅에 뺑소니문화를 없애려면
당국의 끈질긴 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남의 생명, 남의 삶, 남의
가정을 아끼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서울XXXX 흰색승용차...''란 뺑소니차 제보공고가 나붙지 않게
될 것이다.

<김광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