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철도는 내구연한 1백년동안 연인원 1백80억명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그런 철도가 시험선구간에서부터 설계.감리.시공 모두가 부실한 것으로
드러나 국민들에게 실망과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 WJE사의 안전진단 결과 발표된후 정부와 한국고속철도건설
공단, 시공업체 등 건설주체들은 모두 서로 책임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처음부터 설계.감리가 부실했다"(시공업체) "토목공사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정부/고속철도건설공단)는 식으로 어떻게든 책임소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방에 한창이다.

당사자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경부고속철도 시험선구간 부실시공은 정부
공단 시공업체 감리업체의 총체적 책임으로 결론지어진다.

정부는 관리부실,공단은 감독및 설계.감리부실,시공업체는 시공부실,
감리업체는 감리소홀에 대한 책임을 면할수 없다.

특히 정부와 공단의 경우 시공 초기에 이미 설계및 시공상의 부실이
부분적으로 불거지면서 재시공 문제가 거론됐을때 땜질식 처방으로 일관하며
덥어두기에만 급급, 부실을 스스로 키워 왔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속철도 공단의 한 관계자는 "지난 95년 국내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단이
초기 시공물에 대한 안전진단결과 재시공을 신중히 검토할 것을 건의했으나
관련 책임자들이 보고서에 서명을 한 상태서 없었던 일로 묻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평가단외 국내 일부 전문가들이 수시로 문제점을 제기했으나
그때마다 정부의 덮어두기 대응으로 일축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해 김한종 공단이사장이 취임하면서 현장을 둘러본뒤 이같은
실정을 토대로 고속철도 건설 전반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정부에 요구했으나
오히려 질책만 당한채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교부 고위 관계자들은 "시공현장에서 그 정도 실수는 으례히 있는
것"이라며 "별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질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김이사장이 전임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면피용으로
부실시공을 과대포장해 부각시키고 있다"는 인신공격까지 뒤따랐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의 방침은 "다소 문제가 있지만 내부적으로
조용히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정부의 확신없는 방침은 시험선구간에서 부실시공이 공정률에 비례
하도록 방치한 결과만을 낳은채 외국 진단업체에 의해 국내 건설시공능력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지적당하는 망신을 초래했다.

공단의 현장 관계자는 "높은 분들이 처음부터 문제점에 대해 "쉬쉬"하지
않고 문제를 드러내 놓고 대응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안타까워 하고 있다.

덮어두기는 시공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공업체들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공사에 각사에서 내로라하는 토목
기술자들을 집중 투입했으나 얼마안가 일부 공정에서 역부족임을 절감했다.

일부 현장소장들은 언젠가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직감하고 하루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힐 정도였다는게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시공업체들은 그러나 기술적 약점을 감추기 위해 수시로 설계변경까지
해가면서 그냥그냥 공정을 이끌어 나갔다는게 최근에서야 밝혀진 현장
기술자들의 고백이다.

시공능력이 없다는 평가를 피하기 위해 시공기술상의 문제는 철저히 은폐
시킨채 어떻게든 끼워 맞추기식으로 공정을 진행시킨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WJE사의 안전진단을 앞두고 일부 공구에서는 구조물에 나타난 콘크리트
흠집 등을 규정에 맞지 않는 시멘트 배합물로 급하게 위장덧칠한 곳이 많이
발견됐다.

''부실시공 덮어두기'' 현장의 극치였던 셈이다.

< 김상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