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수선하다.

경기침체는 가속화되는데 노동법파문에다 한보사태까지 겹쳐 우리 경제는
지금 내일없이 표류하는 형국이다.

더구나 정치권은 리더쉽을 잃어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고 기업
경영자는 물론 노동현장에서도 신바람이 사라진지 오래다.

이런 세태를 반영, 요즘 몇사람만 모이면 나라현실을 개탄하고 경제를 걱정
한다.

한편에서는 냉소주의가 확산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는 원로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고합그룹 장치혁회장(65)은 창업경영인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직도
맡고 있는 이른바 우리 재계의 원로다.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은 장회장을 경운동 고합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에서
잠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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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김기웅 < 산업1부장 > ]]]

-노동법개정 파문에다 한보부도 사태까지 겹쳐 온나라가 어수선합니다.

이러다가 경제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의 심정도
착잡하고요.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됐다고 보십니까.

"고동성장을 해오는 동안 누적된 모순들을 그때 그때 땜질하는 식으로
처리해 온게 문제였습니다.

더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터진 것이지요.

경기순환적인 측면에서만 안일하게 대응해 온게 화근이었지요"

-특히 노동법개정에 반대하는 근로자들이 연초부터 정치파업을 벌이면서
경제위기감이 고조된 것 같습니다.

노동법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노동법은 그 성격상 일방에 초점을 둬선 안됩니다.

노와 사라는 두 당사자가 있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비행기의 양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잘 날기 위해서는 양날개의 밸랜스가 잘 맞아야 합니다.

우리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비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 입각하자면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고
경영자에겐 고용의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걸 가장 합리적으로 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의 근로자들은 누구라도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동시에 경영자들도
채용의 자유와 일시해고(lay off)가 자유롭게 돼있지요"

-우리 노동법도 미국식을 따라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란 말씀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미국의 경우는 이상적인 모델이지요.

한국이 하루 아침에 미국과 같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개정한 새노동법은 노사양측의 요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안착(soft landing)하려는 목표를
함축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근로자들이나 국민들이 국내 경제현실과 노동법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노동법이 개정됐다는데 있어요.

각 이해집단들이 자신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자기 주장만 하게 된
겁니다"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 자신이 해고될 것으로 우려하는 근로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경제의 현실이 이렇고 임금이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이니 노동법은
이렇게 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근로자들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지요.

책임을 못한 건 정부나 언론도 마찬가지구요.

사실을 제대로 알리면 노동법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경영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성실한 근로자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장과 근로자는 외부에서 아무리 떼놓으려고 해도 헤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보부도 사건이 터지고, 또 정치권 금융권의 비리가
속속 들어나면서 한국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 인식은 우리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한보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고 말 것이란 건 이미 예상됐던 일 아닙니까.

정상적인 경영을 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한보는 지극히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터졌고, 조속한 시일내에 한보와 한국경제의 연결고리를 차단
하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외국인들까지 한보가 곧 한국경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게 해서는 안됩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의 의욕도 많이 위축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 기업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건실합니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처럼 경영여건이 나쁜 곳이 어디 있습니까.

외국인들도 한국인들의 기업가 정신은 세계 최고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기업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광적이라고 부를 정도지요.

이런 때 일수록 기업인들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한보는 한보고 나라경제는 나라경제인 것입니다.

한보가 마치 추락하는 한국기업의 상징처럼 돼있지만 한보가 언제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린 일이 있습니까.

원칙에 따라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해야 합니다.

한국경제의 발전을 시기하는 다른 나라에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됩니다"

-역시 기업가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물론입니다.

일부에서 우리 기업들이 과거 정권에 빌붙어서 성장했다는 비판이 있기도
합니다만 한번 따져 봅까요.

과거 정권이 기업의 발전에 도움준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오히려 지금의 기업들은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많은 역풍과 역경을 견뎌왔기 때문이지요.

정신만 바짝 차리면 이 정도의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나라 전체를 이끌어갈 리더쉽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위기를 타개할 구심축이 없다고 할까요.

"국민들이 갈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국민은 지금 실의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리더쉽에
목말라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권위주의 시대의 추진력 같은게 아닙니다.

국민들은 오히려 "솔직한 것"에 바탕을 둔 리더쉽을 원하고 있어요.

속을 다 보여주면 국민들은 따라 옵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리더쉽이 조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꾸 감추려고만 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한보문제를 예로 들면 어떤 식의 해결이 가능할까요.

"모두들 "나는 책임없다"는 식으로 접근하다보니 일이 꼬이는 것입니다.

한보는 일부 가동중인 공장이 있으니 실태를 제대로 파악해 알려주면 일이
빨리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제는 한보는 한보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예요.

파헤칠 것은 자세히 조사해야겠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경제전체가 지장받지
않는 선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금융기관들도 너무 많이 흔들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부부싸움 하다 난로를 잘 못 던져 집을 태우는 식의 우를
범하는 꼴이 됩니다.

대신 지금이라도 아무 것도 감추지 말고 보여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잔재간이나 임시변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하니 해결이 더딘 겁니다"

-노동법 파문이나 한보부도 사태등도 제대로 접근만 하면 해결이 가능하다
는 얘기 같습니다.

"지나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렵지만 이를 뚫고 가려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국민과 근로자,
기업가들이 있는한 해결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 내놓는 공론 환상 망상등을
언론이 여과없이 보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단일 사건 보다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작년에 2백억달러를 넘어선 무역적자가 대표적인 것이지요.

정부가 올해 작년의 3분의 2 수준으로 무역적자를 줄이겠다고 하지만
달성가능한 목표인지 우려하는 기업인들도 많지요.

"정곡을 찌른 질문이네요.

정부가 세운 올 적자목표 1백50억달러 이하는 쉬운게 아닙니다.

현재 상태로라면 작년보다 늘면 늘었지 줄어들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숫자가 상당부분 허구라는 얘기지요.

국민들에게 경제실정을 솔직하게 보여줘야만 합니다.

국민들이 개선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해서는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올해도 무역적자가 2백억달러를 넘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단순히 숫자만 맞추는 이런 미봉책은 이제 지양해야 합니다.

분명한건 우리 경제의 어려운 조건 가운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게
바로 이 무역적자라는 것입니다.

정부와 기업, 국민들이 총력을 기울여 무역수지 적자폭을 줄여야 합니다.

이 목표가 달성 안되면 모든게 깨지고 맙니다.

기나긴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걸 단순히 1백50억달러 이하로 줄이겠다고만 하면 국민들은 노력하지
않습니다.

솔직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금리 고물류비 등 고비용구조의 타파는 무역수지 적자를 줄인 이후의
과제라는 말씀인데요.

"동시에 진행해야지요.

무역수지개선이 최우선과제라는 얘기일 뿐입니다.

구조적인 악조건을 하나씩 개선해 나가야 장기적으로도 경제회복의 전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해묵은 과제이기도 한데, 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정부가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여기다 통화량 환율 금리 임금
등을 한 고리에 걸고 있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금융기득권자가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 아닙니까.

이들은 물가폭등 가능성을 무기로 역대 정권을 협박해 왔습니다.

"금리를 내리면 물가가 오르니 큰 일 납니다"는 식이었지요.

정치인은 물가가 오른다면 생리상 불안해지는 겁니다.

금리 환율 임금등이 물가와 연계돼 있는건 사실이지만 1백% 연동되는건
아닙니다.

그 고리를 끊지 못해 고비용구조가 깨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금리를 낮춘다고 금방 물가가 치솟는 게 아니예요.

한번쯤 시험적으로라도 풀어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산적해 단기간내 우리 경제가 회복불능에 빠질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더러는 "한국 경제가 한 번 바닥까지 떨어져봐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다"
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래선 안되죠.

다시 올라설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러나 국민이 충분히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어려움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정부도 더 늦기 전에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알리고 컨센서스를 얻어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에 기업들이 세계화를 화두로 앞다퉈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고합도 최근 독일 바스프마그네틱사를 인수하면서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동안 해외에 공장만 세우면 무조건 세계화라고 생각해 왔지요.

그러나 해외진출만이 세계화라면 산업공동화의 우려도 있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21세기형 세계화는 이와는 달라야 합니다.

자기가 경쟁력을 갖춘 상태에서 상대방과 연결하는 것이 기본 개념입니다.

고합은 자체 경쟁력을 국내에 구축해놓고 이를 세계각국과 연결해 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그물처럼 협력망을 구축해 세계를 연결(global intergration)하는
작업이 고합의 세계화입니다.

바스프마그네틱사를 예로 들면 원료인 TPA(테레프탈산)과 PET칩,
베이스필름등은 울산구조재구축공장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 놓은 후에
자기테이프분야의 세계1위 업체인 바스프와 연결한 것입니다.

국내의 기본 경쟁력에 해외 경쟁력을 링크시켜 협력경영을 할 때라야
진정한 국제경쟁력, 종합경쟁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협력경영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데요.

"21세기는 세계 톱 기업끼리 연합.결합하는 "글로벌 협력경영"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무국경(borderless)시대를 지나 상호의존.협력(Interdependance)시대가
되는 겁니다.

21세기는 "창취"의 시대입니다.

내것만 차지하면 된다는 20세기식 쟁취는 지양돼야 한다는 겁니다.

협력경영의 철학으로 바스프와 대화를 했고 그 결과 터기업체에 인수되는
것을 극구 반대해 왔던 바스프 노조원들의 환영을 받아낸 겁니다.

일본 업체들이 우리의 성공사례를 최근 스터디하고 있는 것도 고합의
협력경영이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룹의 이름을 보세요.

최고의 조화(고합:High Harmony) 아닙니까"

-평소 후배 경영인들을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해주시나요.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전쟁에서도 그렇고 기업의 경영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속일 때도 있는 법이거든요.

실상을 정확히 알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곤 항상 하는 얘기지만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고 있어요.

중국인 친구가 한국기업인들은 마치 "광동개"와 같다고들 하더군요.

광동에선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는데 광동개는 주인이 잡아먹으려고
껍데기를 벗기면 도망갔다고 또 돌아오고 또 요리하려고 꼬리를 자르면
도망가고, 그러다가 결국 또 집으로 돌아와서 잡혀 먹힌다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기업가들은 부도가 나도 감옥에서 다음 사업계획을 세운다지
않습니까.

절대로 굴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지요"

-특히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어 특히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논리가 경제에 우선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지요.

"정말입니다.

사원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얘기를 하나 할까요.

수나라가 1백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 왔을 때 막은 사람이 누굽니까.

모든 사람이 포기하자가고 했을 때 의연히 일어선 사람이 을지문덕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지금 수나라 1백만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기회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위기에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니까요.

강감찬 이순신 장군 등이 그런 분들 아닙니까.

그러나 영웅들에겐 공통점이 있지요.

바로 사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군으로 일생을 마쳤을 뿐 정권과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우리 정치인들도 최근의 노동법 및 한보부도 사태를 대통령선거와 연결
시켜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럴수록 문제는 복잡해져만 갈것입니다.

다시 한번 얘기하자면 국민들은 사심없는 영웅을 기다리고 있어요"

-워낙 바빠 운동하실 틈도 없으시겠습니다.

"웬걸요.

매일 아침 뒷동산에 올라 맨손체조를 한시간 합니다.

딱히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열심히 일하는게 운동 아닙니까.

일하다 보면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걸 마음에 두면 독이 됩니다.

이런 독을 생기지 않도록 하는게 진정한 운동이지요.

그래서 토요일엔 꼭 남들이 잘 찾지 않은 작은 산에 갑니다.

등산로 없는 산에 들어가 첫 발자욱을 남기면서 개척가 정신을 배우지요"

< 정리 = 권영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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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32년 4월24일생
<>용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법대 입학 단국대 졸업, 고려합섬 창업, 고합그룹회장(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현)
<>한-러극동협회회장(현)
<>섬유산업연합회 명예회장(현)
<>상훈 : * 한-중수교훈장
* 러시아우호훈장
* 아시아태평양생산성대상 등 다수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