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건설에 다니다 지난달 명예퇴직한 정모부장(45)은 15일 고심끝에 캐나다
해외이민을 위한 한 설명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캐나다 학교로 전학시켜놓고 있다.

시중 5대은행의 하나인 B은행 김모차장(41)도 해외이민수속을 챙기느라
요즘 정신이 없다.

지방 J시청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천모씨(51)도 비슷한 케이스다.

어차피 몇년후면 정년퇴직할테니 더 나이가 들기전에 해외에서 삶의
터전을 잡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몇몇 관련업체 등에 수소문해봤지만 일자리 얻기가 힘든데다 스스로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견직장인들의 해외이주열풍이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감량경영으로 인해 회사에서 떼밀려난 명예퇴직자나 조기퇴직자들이
제2의 인생을 해외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최근에 감량경영방침이 발표된 공무원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같은 점에서 해외이주바람은 과거와는 다르다.

특히 80년대에 유행한 해외이민바람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그때는 돈있는 사람들이 노후생활을 즐기기위한 이민을 갔다.

50~60년대 일자리가 없어 젊은이들이 직장을 찾아 해외로 나갈때와도
전혀 딴판이다.

요즘 이민바람은 직장에서 밀려난 초로의 50대 전후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떼밀려 나가는 격이다.

이들중엔 치열한 입시경쟁때문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해외이민을
택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그래서인지 예의 정씨는 이날 한 해외이민알선업체의 이주설명회에
참석하면서 허탈감이 분노로, 그리고 다시 자책감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씁쓰레 바라봤다.

"지난 70~80년대의 경제성장은 다 누구의 역할이었는데 이젠 고국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나."

내년이면 캐나다의 조그만 지방도시에서 주유소를 경영할 계획인 정씨는
최근 감량경영이라는 명목하에 한창 일할 나이에 기회를 빼앗아가버린
사회에 대해 불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김씨의 경우도 똑같다.

아직은 자신의 직책과 이름이 써진 명패가 달린 책상을 갖고 있지만
언제 명예퇴직자 대상에 오를지 몰라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해외이민으로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에 사로잡혀 업무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보다는 하루빨리
이 땅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고2와 중3인 자녀교육이 문제이긴 하지만 치열한 국내입시경쟁을 치루느니
해외에서 적성에 맞게 소질을 길러주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실제로 해외이민알선업체인 법흥공사에는 지난 여름부터 이민상담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 회사 김영수상무는 "최근들어 직장경력과 투자능력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업인이민이나 투자이민이 크게 늘고 있는 추세"라고 실정을
설명한다.

캐나다 미국 등으로 해외이민을 주선하고 있는 남미이주공사의 경우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명예퇴직자를 위한 해외이민 세미나"를 개최했다.

50대 전후의 나이가 든 70~80여명이 참가한 이 세미나에서 해외이민을,
그것도 즉석에서 결정한 사람이 15명이나 될 정도였다.

남미이주공사관계자는 "명예퇴직자를 위한 세미나이긴 했지만 현재 직장에
다니는 40대 후반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다"며 "최근 감량경영 등 사회전반적
변화에 따라 이민을 심각히 고려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세계로이주공사도 15일 2백여명을 대상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을 대상으로 투자이민과 취업이민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한데
이어 17일에도 설명회를 한번 더 가질 계획이다.

이 회사 이종만사장은 "대기업 명예퇴직 등의 영향으로 상담전화가 많이
몰려들고 있어 정신없이 바쁠 지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바람을 타고 해외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관련업계에서는 이들
명예퇴직자나 조기퇴직을 염두에 둔 직장인들 덕분에 때아닌 활황을 맞고
있다.

지난해 초까지만해도 현대개발이주공사 등 4개에 불과했던 해외 이주담당
업체도 올해들어 14개로 크게 늘어났을 정도다.

특히 이들 업체는 명예퇴직자 등 해외이민대상자들이 늘고 있는 점을
감안, 그동안 1달에 1번정도 했던 이민설명회를 지난 8월이후 2-3번으로
늘려잡고 지방순회설명회까지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해외이주바람이 결코 사회전반적으로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우수인력이 빠져나갈 뿐만아니라 사회 중간층의 동요로 전반적인 사회불안을
야기할 가능성도 많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관련 이필상 고려대경영학과교수는 "어려운 경제상황을 감량경영
등으로만 해결하면서 그동안 경제성장에 땀흘려온 근로자에게만 전가할 것이
아니라 다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개하려는 노력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 김준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