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원그룹이 22일로 창립 22주년을 맞았다.

두원그룹은 모기업인 두원정공을 비롯 12개 계열사와 두원전문대 안성공고
등 학교법인을 두고 있다.

지난 74년 한국디젤기기로 출발한 이 그룹은 그동안 디젤엔진의 연료분사
장치 등 자동차핵심부품을 주로 생산해 왔으나 21세기를 맞아 사업다각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월 인수한 마산의 대신생명을 기반으로한 종합금융사업, 오는 6월에
발표되는 주파수공용통신(TRS)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통신사업, 두원중공업
을 통한 항공우주, 생명공학 등의 신규 사업분야 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지난 94년 최병렬 전서울시장의 전국구의원직을 승계하면서 14대
국회에 진출했던 김찬두회장(65)이 다음달중 경영일선에 복귀하게 되면
이같은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두원의 창업초기인 70년대를 기초화, 80년대를 도약, 21세기를 앞둔 90년대
를 안정및 다각화시대라고 규정, 적극적인 사업확장을 벌이고 있는 김회장을
서울 신사동 두원그룹 회장실에서 본사 이기한 산업2부장이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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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두원그룹의 창립 22주년을 축하합니다.

지난해까지는 계열사별로 창립기념식을 따로 치렀습니다.

올해부터 모기업인 두원정공의 창립기념일인 22일을 그룹기념일로 통일
했습니다.

22일이 평일이어서 토요일인 지난 18일 기념행사를 가졌지요.

-기념행사는 잘 치렀습니까.

<> 김회장 =3,600명 전체 그룹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안성의 두원공전
대운동장에서 열려 큰 성황을 이뤘습니다.

내년부터는 임직원의 가족까지 초청, 제 2창업기를 맞는 두원의 결속력을
더욱 높일 계획입니다.

-모기업인 두원정공 창업전에 한국야쿠르트유업이사와 한남고속버스전무를
역임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 김회장 =야쿠르트는 잘 아는 분이 대주주로 있어 일본 야쿠르트와 기술
도입 계약때부터 참여했지만 비상근이사였습니다.

친구가 사장이었던 한남고속버스의 경우 전문경영인으로 지분의 30%를
가지고 참여했습니다.

-원래 재력이 있으셨군요.

그 재원은 어디에서 확보했습니까.

<> 김회장 =지난 63년 하사관으로 군대를 제대한 후 한동안 무일푼으로
지냈습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중 미군으로부터 고철을 불하받아 판매하는 친구가
있어 그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어서 단시간내에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남고속버스 지분 30%를 인수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두원그룹의 밑거름이 된 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원정공의 창업동기는.

<> 김회장 =한남고속 전무시절 벤츠 고속버스가 한번 고장나면 부품
구하기가 힘들어 6개월이상 운행을 하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주로 연료분사장치의 고장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엔진 핵심분야인 노즐과 연료분사장치의 국산화를 결심
했습니다.

마침 안성에 있는 조그만 노즐공장이 매물로 나와 이를 인수했지요.

이것이 두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겠네요.

<> 김회장 =인수한 노즐공장이 0.3미크론의 허용공차를 요구하는 첨단
엔진부품을 생산하기에는 너무나 낙후돼 있었습니다.

생산기계는 물론 관련 기술자도 없었습니다.

외국과의 기술제휴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지요.

우선 일본디젤기기와의 기술제휴인가를 경제기획원에 신청했으나 수출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반면 기술제공측인 일본디젤기기는 해외시장 잠식을 우려, 수출을 허용하는
기술제휴계약은 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계속된 협상끝에 "양측의 합의아래 수출을 할 수 있다"는 선에서 상호양보
가 이뤄져 기술도입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술도입에는 성공했으나 국산화에 필요한 설비자금이 부족했지요.

사업계획서를 들고 시중은행을 돌아다녔지만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6개월을 쫓아다녔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의 회장과 전무가 이 사업의 중요성과 사업성을 높이 평가,
외국기계를 수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줬습니다.

죽기살기로 조른 결과지요.

이때 도입한 250만달러의 차관으로 오늘날 두원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디젤기기에서 두원으로 회사명을 변경한 이유가 있습니까.

<> 김회장 =디젤이라는 용어가 공해산업이라는 인상을 줬기 때문에 지난
92년 회사명 변경을 생각하고 제가 직접 작명을 했습니다.

두원의 "두"자는 제 이름에도 나오는 한자인데다 "원"자와 조합할 경우
방향을 제시하는 별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 두원으로 정했습니다.

작명가에게 물어봐도 좋다고 하고 듣기에도 좋아 광고대행사에 "두원"
이라는 이름으로 그룹CI를 의뢰했지요.

-지난 74년 종업원 13명으로 출발한 한국디젤기기(두원정공의 전신)가
현재 연매출 7,000억원을 기록하는 두원그룹으로 성장했는데 경영비법은.

<> 김회장 =최고의 기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각오로 기술개발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매출액의 5%를 연구개발비용으로 투자를 계속해 오고 있지요.

제품 또한 종업원들의 혼을 넣어 최고의 품질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두원제품을 믿고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두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할수 있을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경영비법입니다.

-창립 22주년을 맞아 계열사별 경영방향을 설정한다면.

<> 김회장 =모기업인 두원정공과 한국보쉬기전은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
매연후처리장치등 자동차 핵심부품 부문에서, 카에어컨과 패키지에어컨을
생산하는 두원공조와 냉기는 공기조절기 부문에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최고
의 위치를 굳힐 방침입니다.

두원중공업은 컴프레서 전문회사및 우주항공산업 진출을, 대일생명은
금융전문업체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 있는 두원재팬, 인도네시아의 자동차부품업체 P T KOIN
및 올해 중국에 설립될 카에어컨 합작회사인 송요두원을 통해 적극적인
해외진출도 추진하겠습니다.

-지난해 "보람의 일터"라는 노사화합상을 받으셨지요.

특별한 종업원 관리기법이 있습니까.

<> 김회장 =지난 74년 창업할 당시 13명이었던 종업원이 현재 3,6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200명까지는 가족같은 분위기로 화합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렵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없는 것은 모든 종업원을 한식구로 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월급을 체불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전에 회사가 어려울때에도 달러이자로 사채를 조달해서라도 월급을
제때 지급했습니다.

물론 관리직에게는 2~3일 늦은 경우가 있었지만 기술직에게는 하루라도
결코 체불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사주제나 종업원지주제등 종업원에 대한 대우향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나요.

<> 김회장 =창업초기에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했으나 연료분사장치등을 개발
할 때 제휴한 일젝셀사와 독보쉬사가 각각 20%의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증자할 경우 51% 주식보유 원칙이 지켜지는 범위내에서
이 제도를 부활시킬 계획입니다.

-지난 1월 대일생명을 인수했는데 기계공업인으로 정평이 나있는 김회장
에게는 너무 소프트한 업종이 아닌지요.

<> 김회장 =기계공업인으로 호텔등 소비산업에는 결코 손을 댈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두원의 외형이 성장하면서 자금루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금융산업
진출을 고려했습니다.

대일생명 인수에 앞서 상호신용금고 인수를 추진했으나 프리미엄이 자산의
5~6배에 달해 인수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대일생명 인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경영난을 겪고 있던 사주로부터 제안
이 직접 들어와 이뤄지게 됐습니다.

물론 금융계통기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지요.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 배경은.

<> 김회장 =민정당의 중앙위원으로 있던 친구가 입당을 권유해서 진출
했습니다.

중앙위원회에서 수석부위원장까지 맡아 전국구 순위가 41번이었는데
최병렬씨가 성수대교 붕괴후 서울시장으로 진출, 의원직을 승계했습니다.

1년6개월동안 좋은 경험을 했지만 기업인은 역시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수도권TRS사업계획 제출에 이어 무선호출기 생산에도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향후 정보통신산업 진출계획은.

<> 김회장 =수도권TRS사업에 두원정공을 대주주로 일진, 스탠더드텔레콤,
남성, 하나은행등 46개사를 컨소시엄으로 구성해 지난 4월 사업계획서를
정통부에 제출했습니다.

사업자로 선정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선호출기는 디자인이 확정됐고 성능이 검토돼 오는 8월부터 생산, 판매될
예정입니다.

국내에서는 TRS서비스사업과 무선호출기 제조사업으로 자리를 굳히고
향후 글로벌화된 정보통신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정보통신분야에 과감한
R&D투자및 선진기술습득등에 적극 나설 것입니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해외통신 컨소시엄에도 적극 참여할 예정입니다.

또 컴퓨터 소프트웨어 주변기기 회사인 (주)멀티그램을 종합 멀티미디어
전문기업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수도권 TRS사업에 전력투구하는데 만약 탈락한다면.

<> 김회장 =탈락하더라도 관련 분야에 분명히 발을 디딜 것입니다.

국내 자동차수가 800만대인데 2000년이 되더라도 1,000만대 이상으로
증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동차부품은 이제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두원의 사업방향도 차세대 업종인 정보통신쪽을 강화할 것입니다.

-2000년대 두원의 위치를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지요.

<> 김회장 =2000년의 그룹매출을 3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재계순위 200위권인 두원을 100위내로 진입시킬 계획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급변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하면서 업종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예컨대 60년대 창업한 기업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기업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기업들이 업종선택을 잘못해 문을 닫은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첨단 업종선택이 기업성장의 99%를 좌우한다고 봅니다.

-시대흐름에 따라 첨단업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모두
다 정보통신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김회장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는 회사들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회사가 최종 승자가 될것이기 때문에 소비자
에게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통신사업은 면허취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영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성공고 두원공전 설립등 기술인력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데.

<> 김회장 =창업초기에 우리가 육성해 놓은 유능한 기술인력을 대기업에서
빼내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당시 전문기술인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주위에서 기업규모에 맞지 않는 학원운영에 대한 말도 많았지만 올해
전문대학 1회 졸업생이 배출됐고 우리의 힘으로 기술전문가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이들의 사회진출을 적극 지원, 기업이익의 사회환원및 공익성을
높일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대한탁구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탁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언제
부터입니까.

<> 김회장 =지난해 7월 전임 최원석회장의 제의를 받고 한달여의 심사숙고
끝에 회장직을 수락했습니다.

탁구와는 지난 78년부터 2년간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었으며 81년부터는 탁구동우연맹회장을 계속 맡았기 때문에 친근한
스포츠였습니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귀결지을수 있는데 하루에
잠을 몇시간 주무시나요.

<> 김회장 =창업초기에는 모든 면에서 틀이 잡히지 않아 부.과장회의가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지속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경우 집에 가 3~4시간 자고 다음날 출근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어 5시간 정도는 자고 있습니다.

-특별한 건강유지 비결이 있습니까.

<> 김회장 =주말에 등산을 자주 갑니다.

국회의원때는 골프를 거의 치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필드에 자주 나갈
계획입니다.

야외에서 운동을 하고 나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져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됩니다.

-자녀분들은.

<> 김회장 =2남1녀를 두고 있습니다.

장남은 두원정공의 기획실장, 차남은 그룹에서 종합조정실장으로 있고 딸은
출가했습니다.

손주가 5명인 할아버지입니다.

< 정리=송진흡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