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당국의 신변위협으로 인공기를 게양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북지원 쌀 15만t중 첫 선적분인 2,000t을 싣고 지난25일 북한
청진항을 향해 동해항을 출발한 남성해운 소속 씨아펙스호(3,000t급)가
30일 새벽 4시50분 부산항 제1부두 11번 선석에 접안 귀향했다.

다소 지친표정인 김예민선장(38.부산 동래구 명륜동)과 선원15명은
"무사귀환해 다행"이라며 "다시는 북한쌀 수송은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향후 쌀수송에 문제가 많을 것임을 시사했다.

다음은 김선장과 일문일답.

-동해항 출항이후부터 부산항 입항까지의 일정은.

"지난 25일 동해항을 출항해 26일 오후4시경 청진항 도선사 묘지에
도착 대기후, 27일 오전8시 부두에 접안해 10시45분께 쌀하역을 마쳤다.

28일 오후4시에 북한영해를 벗어났으며 30일 새벽1시께 부산항 검역
묘지에 도착했다"

-태극기를 달고 입항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국제법상 선미에 선박소속 국기를 달고 마스타에 입항국가 국기를
다는것이 원칙이다.

이문제로 2시간 가량 도선사와 실랑이를 벌이는데 청진항 항장
(우리의 지방해운항만청장격)의 신변위협으로 불가피하게 인공기를
달게됐다.

부두접안후에는 무장군인 3명이 선박경계를 서며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또한 통신시설과 촬영시설을 한곳에 모아 폐쇄했다"

-쌀 하역작업 상황과 청진항 분위기는.

"하역작업은 순조로왔으나 육상크레인등이 노후화돼 3~4차례 고장이
났다. 쌀의 대부분은 부두에 적재했으나 일부는 지난53년도에 제작된
화차에 실려 어디론가 운송됐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60년대를 보는 것
같았다"

-북한 인부들이 한국쌀인줄 알고 있던가.

"한국쌀인줄은 알고 있더라. 그러나 식량난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선원과의 대화도 꺼려해 더이상 북한 사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쌀인도 절차는.

"북경회담에 참석했다는 삼천리총회사 강현명씨가 선장실에서 서명
했다"

-2시간동안 북한땅에 머물었다는데.

"삼천리총회사 초청으로 당직자 3명을 제외한 13명이 부두에서 100m
떨어진 객실 27개의 3층규모의 천마산호텔에서 중국식으로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다.

이자리에는 강씨와 청진항 항장등 북측에서 9명이 참석했다. 호텔
수준은 매우 낮았으며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만 오갔다"

-주고받은 선물과 하고싶은 말은.

"우리가 준것은 없으며 강씨가 선원1인당 곡주2명씩 총32병을 선물했다.
국기게양을 못해 할말이 없다. 다시 북한지원쌀 수송을 할 마음이 없다"

< 부산 = 김문권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