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 하락은 국내 경제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그랬다. 제조 원가가 싸져 수출경쟁력이 올라갔다.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중동 등 산유국들이 플랜트 발주를 무더기로 연기하면서 건설 엔지니어링 조선 철강 업체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하던 중동 국부펀드들이 투자하기는커녕 자금을 회수하면서 우리은행 매각작업 등도 차질을 빚고 있다. 반면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로 수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미미하다. 국제 유가가 하락할수록 국내 경제는 ‘역(逆)오일쇼크’라는 몸살을 앓아야 하는 구조다.
[깊어지는 '역오일쇼크'] 아람코 30억달러 공사 연기…'수주 올인' 한국 건설사 충격
◆건설 프로젝트 줄줄이 무산·연기

건설·엔지니어링 업계는 저유가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건설·엔지니어링 업체의 해외 수주액은 461억4434만달러로 전년(660억993만달러)보다 30% 줄었다. 2007년 이후 최악이다. 중동, 북부 아프리카, 남미 등의 산유국들이 공사발주를 연기한 영향이 컸다.

유가 하락세가 심화된 올 들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도로·철도와 발전소 등 인프라 사업 수주도 어려워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대우건설 등 국내 10여개 대형 건설사들이 1~2년간 입찰을 준비해온 30억달러 규모의 프로젝트인 ‘라스 타누라 청정 에너지 플랜트’ 재입찰을 잠정 중단했다.

카타르의 65억달러 규모 ‘알카라나 석유화학 단지’ 프로젝트와 이라크의 ‘주바이르 유전개발’ 등 주요 플랜트 사업 발주도 줄줄이 연기됐다. 러시아에서도 국내 주요 대형 건설회사들이 눈독을 들였던 ‘옴스크 석유화학 플랜트’ 발주가 무기한 연기됐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인프라·교통 부문 예산을 작년보다 50% 이상 삭감할 계획이어서 ‘수주 가뭄’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건설사들도 속출하고 있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플랜트 공사에서 1400억원가량을 지급하지 않은 사우디 발주처를 상대로 국제 중재를 신청했다. 한화건설도 중동지역의 프로젝트들이 차질을 빚으며 미청구공사 금액이 작년 3분기 말 기준 9244억원으로 증가했다.

◆금융·증권·조선·철강업계도 타격

유가 하락은 조선·철강 업계에도 치명적이다. 유가가 떨어질수록 해양플랜트 발주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저유가가 지속되면서 지난해 발주가 예정됐던 해양 프로젝트 대부분이 무기한 미뤄졌다. 셰브론이 발주하는 15억달러 규모의 태국 ‘우본 프로젝트’와 40억달러 규모의 나이지리아 봉가 부유식 원유생산설비(FPSO)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 사례다.

현대중공업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 회사인 아람코와 합작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조선소를 짓는 협력 프로젝트가 더디게 진행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철강업계는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철강 수요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저유가 기조가 지속되면서 철강제품 가격은 일제히 하락했다. 올해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중동 인프라 사업에 공격적으로 진출한 포스코는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포스코건설 지분 38%를 사우디 국부펀드(PIF)에 매각하고, PIF와 공동으로 사우디 국민차 사업과 중동 인프라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낙관만 할 수 없게 됐다.

중동 재정난의 여파는 금융권으로도 번지고 있다. 중동 국부펀드는 최근 한국 정부와의 우리은행 지분 매입 협상을 잠정 중단했다. 유가 하락으로 투자 여력이 줄었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부랴부랴 유럽 투자펀드를 대상으로 매각을 타진하고 있다.

이광우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저(低)유가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은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사업 다변화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보라/이현일/도병욱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