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째 ‘그대로’ > 학교 인근 호텔 신축 규제가 풀리지 않아 6년째 방치돼 있는 서울 경복궁 옆 대한항공 7성급 호텔부지.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 6년째 ‘그대로’ > 학교 인근 호텔 신축 규제가 풀리지 않아 6년째 방치돼 있는 서울 경복궁 옆 대한항공 7성급 호텔부지.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지난 10일 서울 경복궁 옆. 담벼락에 둘러싸인, 축구장만한 빈 땅(3만6600㎡)엔 온통 잡초만 무성했다. 벌써 6년째 이 상태로 방치돼 있다. 땅 소유주인 대한항공은 2008년부터 이곳에 7성급 한옥호텔을 포함한 복합문화단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주변 200m 내 호텔 건립을 제한하는 학교보건법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관할 교육청(서울중부교육청)은 호텔이 들어서면 인근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의 학습 환경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대한항공 측은 “전체 시설 중 호텔은 10~15%에 불과하고 유해시설도 없는데 반대가 워낙 강경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밝혔다.

○15개월째 표류중인 규제 개선 법안

[탈출! 저성장-3만달러 넘어 4만달러로] "학교 옆 호텔·크루즈 카지노 안돼"…규제에 '약골' 된 서비스업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한항공의 사례처럼 근처에 학교가 있다는 이유로 짓지 못하는 호텔이 전국에 60곳이나 된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12년 10월 관광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술집, 나이트클럽, 도박장 등 유해시설이 없는 호텔은 학교 옆이라도 지을 수 있게 하자는 법안이다. 하지만 ‘대한항공 특혜법’이라는 민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이 법안은 15개월째 발목이 잡혀 있다.

저성장 탈출의 핵심 축이 돼야 할 서비스 산업이 경쟁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각종 규제 때문이다. 더욱이 외국에는 이런 종류의 규제가 없다. 지난해 6월17일 국회 소관 상임위(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논의 때 박명수 전문위원이 제출한 ‘관광진흥법 개정안 검토보고서’를 보면 미국, 호주, 싱가포르, 중국, 프랑스에는 학교 옆 호텔 건립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한진수 경희대 호텔경영학과 교수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 학교 없는 지역이 어디 있느냐. (학교 옆 호텔 건립을 제한하는) 그런 논리라면 서울에 호텔을 지을 곳이 거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개정안은 작년 6월17일 상임위 논의를 끝으로 국회에서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았다.

○카지노 없는 크루즈관광

최근 민영화 논란이 일고 있는 의료 서비스 분야는 규제 완화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세다. 정부가 작년 말 병원의 영리목적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기로 하자 의료계는 곧바로 “의료 민영화 시도”라고 반발하며 길거리로 뛰쳐나올 태세다. 약사 여러 명이 돈을 대는 기업형 약국(법인약국) 설립 허용 방안에 대해선 약사들이 “법인약국이 생기면 동네약국 다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하지만 영리목적 자회사는 경영난에 빠진 병원의 수익성 개선을 위한 조치로 의료 민영화와는 상관이 없고 법인약국 허용은 2002년 ‘법인약국 설립을 금지하는 현행 약사법은 위헌’이란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른 후속조치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카지노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 중국 합작사인 리포&시저스 등 외국 자본이 중국인 고객을 노리고 인천 영종도에 카지노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인허가권을 쥔 문화체육관광부는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일본, 러시아, 대만, 필리핀, 캄보디아 등 아시아 각국은 카지노 설립에 적극적이다.

해양수산부가 작년 7월부터 추진하는 ‘외국인의 선상 카지노 허용’ 법안(크루즈산업 육성법)도 “산업 활성화를 가장한 도박 육성법”이라는 민주당의 주장에 가로막혀 있다. 2012년 부산과 일본 규슈를 오가는 크루즈 관광상품을 내놨다가 적자 누적으로 운항을 중단한 하모니크루즈의 정정희 경영지원본부 이사는 “중국 관광객은 카지노가 없으면 크루즈를 안 탄다”며 “카지노 없이 크루즈를 운항하라는 건 총알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대책만 발표하면 뭣하나

이런 논란과 갈등은 비단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저성장 궤도에서 탈출하려면 양질의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는 건 10년도 더 된 얘기다. 이미 이명박 정부에서만 20차례의 서비스규제 완화 대책이 있었고 현 정부 들어서도 두 차례의 서비스 산업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풀린 규제는 별로 없다.

그 결과 한국의 서비스 산업은 선진국 가운데 최약체로 전락했다. 이호승 기획재정부 정책조정심의관은 “도소매, 유통, 음식숙박업은 이미 꽉 차서 성장은커녕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고 의료처럼 경쟁력 있는 분야는 이익집단의 반발 등에 봉착해 한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한국 서비스산업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금 뭘 해야 할지 다 아는데 혁신이 안 되는 건 찬반이 갈리기 때문”이라며 “관건은 우리 사회의 갈등 조정능력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