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988년말 소련에 '한국과 관계정상화시 사절단 철수' 위협
노태우 정부 "한소수교·4강 교차승인시 주한미군 철수 가능"
1990년 외교문서 비밀해제…소련 "北 신경질적 반응·한국 너무 홍보말라" 당부
[외교문서] 암호명 '태백산'…김일성 위협속 극비진행 첫 한소정상회담(종합)

"한소 정상회담 합의가 최종순간 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소측이 미소정상회담 종료 시까지 완벽한 보안을 요구했다.

"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개혁 노선이 맞물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 1시간 5분간 이뤄진 첫 한소 정상회담에 한국 외무부는 당시 이런 평가를 문서에 남겼다.

외교부는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두 달간 극비리 추진된 한소 정상회담 등이 담긴 30년 경과 외교문서 2천90권(33만 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29일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에는 외교관계도 수립 안 된 소련과의 정상회담 성사와 한소 국교수립 과정, 북한 반발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과 관련한 이슈들이 담겨 있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에 북한은 그야말로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감한 북방정책 추진에 나선 한국과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을 선언한 소련 간 관계 개선 분위기가 형성되자 북한 김일성 주석이 직접 소련 측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외교문서를 보면 김일성 주석이 소련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두고 소련 외무장관과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고 1989년 1월 방한한 미구엘 스테클로프 소련연방상의 고문이 코트라 측과 면담에서 밝혔다.

김 주석이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에게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를 언급하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외교문서] 암호명 '태백산'…김일성 위협속 극비진행 첫 한소정상회담(종합)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수교를 염두에 두고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적당한 계기를 찾고 있던 노태우 대통령은 4월 7일 미국 방문 계획(5월 말로 추진)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절호의 기회를 엿보게 됐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애초 6월 말로 예상됐던 방미 계획을 앞당겨 미소 정상회담을 위해 5월 30일 워싱턴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우리와의 대화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푸는 최상의 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라며 '워싱턴에서의 한소 정상회담 추진'을 지시했다.

추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청와대 고위 비서진들이 온갖 통로로 고르바초프 대통령 측근과 접촉해 정상회담을 타진했지만, 긍정적인 회신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국내 정치 상황 등으로 노 대통령의 방미 계획마저 취소될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포기하지 않고 막후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마침내 소련 측이 5월 중순 '6월 4일 회동하자'고 동의했다.

노태우 정부는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한소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며 5월 31일 대외 공식발표 전까지 누설이 안 되도록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미국 일정이 빡빡해 한소 당국은 정상회담을 불과 이틀 앞두고서야 '페어몬트호텔에서 6월 4일 오후 4시경부터 1시간 정도'로 구체적 시각과 장소에 합의하는 등 막판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외교문서] 암호명 '태백산'…김일성 위협속 극비진행 첫 한소정상회담(종합)

한국과 소련은 북한을 의식해 철저한 보안 속에 '로우키' 행보를 했다.

소련 측은 '북한이 무척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측이 동 회담을 지나치게 홍보(Play up)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한국 측에 당부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주소련 북한대사대리는 한소 정상회담 후 소련 외무성을 항의 방문해 '이 회담이 한반도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고 남·북한 간 첨예한 대립을 조장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과 소련은 정상회담을 하고 넉 달도 안 된 그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노태우 정부가 한소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주한미군 철수도 가능하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홍순영 당시 외무부 2차관보는 1989년 4월 블라딜렌 보론초프 소련 '극동 어페어즈'(Affairs)지 편집장과 면담에서 "한·소 수교 및 4강의 교차승인과 국제적 보장이 확보된다면 주한미군 철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소련 측이 '한소 수교 시 주한미군 철수 여부'를 묻는 말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노태우 정부의 소련과의 수교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한소 양국이 9월 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한·소련 외무장관회담에서 수교일을 당초 실무급에서 합의했던 1991년 1월 1일에서 회담 당일로 앞당긴 자세한 배경도 드러났다.

회담 기록을 보면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

우리가 처음 회담을 갖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며 공동성명서 발효일을 9월 30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은 같은 날 유엔에서 열린 '아동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을 언급, "오늘은 특히 세계 정상들이 모여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논의하는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라며 동의한 것으로 기록됐다.

한소가 '공동 코뮤니케'의 수교 날짜를 양국 외무장관 회담 당일 변경한 것을 보여주는 문서도 이번에 공개됐다.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한국의 요청에 즉석에서 뒤쪽에 배석한 실무자에게 러시아어로 작성된 '공동 코뮤니케'를 달라고 해 날짜에 줄을 긋고 '1990년 9월30일'로 정정하고 한국어로 작성된 '공동 코뮤니케' 문서에도 가필로 '90년 9월30일'로 기재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도서관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은 외교사료관을 방문하면 열람할 수 있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28차례에 걸쳐 3만여 권(약 424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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