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 ILO 가입했다 탈날라…노태우 정부, 노동운동 격화우려에 보류
31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9년 외교문서에는 노태우 정부 당시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여부를 놓고 노동운동 격화 우려에 따라 '갈팡질팡'했던 과정이 엿보인다.

당시 ILO는 유엔전문기구 가운데 한국이 유일하게 가입하지 않았던 기구였다.

1982년부터 매년 옵서버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가입에 힘을 기울였지만, 총회 참가 대표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한 상황에 북한이 반대하면 득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 도전을 망설이게 하는 불안 요소였다.

하지만 국가 위상과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 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1989년 총회를 앞두고 1차 추진을 했다가 일단 호흡을 고른 뒤 이듬해 차기 총회에서 '승부'를 보기로 하고 연말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추진해보니 문제는 국내적 상황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노동운동이 분출하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ILO의 기준과 국내법이 합치하지 않았던 것.
1989년 12월 19일 ILO 가입추진 대책 협의에서 노동부는 당시 정부가 전교조, 공무원 노조, 전노협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가입 후 ILO가 문제 삼으면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또 국내법상 복수노조 금지 규정이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배되는 점도 ILO로부터 지적받을 수 있는 만큼, 노동부로서는 '추진 보류' 건의를 내부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었다.

이어 열린 1989년 12월 27일 관계부처회의에서는 동구권 관계 개선으로 득표 여건이 개선됐으니 조속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청와대와 총리실, 노동부가 노사관계 상황을 지켜본 뒤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결국 '보류'로 결정됐다.

회의 자료에는 "국내 노동문제에 대한 ILO 간여는 국내 정치·경제면에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한다면서 "재야 진보 정치권이 국내 노동·사회 문제를 ILO를 통해 정치적으로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보류 결정에 대한 '대외 설명 논리'로는 "북한의 적극적 반대 책동이 예상되고 ILO 가입 요건이 워낙 까다롭다"라는 것을 준비했다.

이후 한국은 1991년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면서 ILO에도 가입한다.

하지만 ILO의 핵심협약 8개 가운데 '결사의 자유' 관련 조항 등 4개는 약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회 비준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