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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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에게 1997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외환위기’로 국가가 부도날 지경에 처했던 그 경험은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아마 40대 이상에게는 ‘나라가 망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라는 뼈아픈 체험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외침으로 피지배국가가 되지 않아도, 경제가 잘못되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지금의 베네수엘라처럼.

경제위기에 외환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뒤 재지 않고 나라살림을 공무원들 멋대로 방만하게 쓰면 ‘재정위기’도 맞을 수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의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이 그렇게 재정퍼붓기를 하다가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지역적 현상으로는 ‘산업위기’도 많이 보게 된다. 2008년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도 있다.

외환도 재정도, 금융이나 산업도 한계상황에 다다르면 출구찾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정권 교체는 기본이고, 국가의 근본이 흔들린다. 경제는 그만큼 중요하고 어렵기도 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구제금융 빌려주는 IMF(국제통화기금) 요구 조건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조금 심하게 말하면 식민지처럼 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양상의 경제위기가 말 그대로 다 위기이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체제에서는 특히 외환위기를 경계해야 한다. 경상수지 적자로 외환보유고가 크게 줄어들고 단기자금, 특히 투기성 외화가 빠른 속도로 유출되면서 대외 거래에 필요한 외환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환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환율은 급등하고 물가도 치솟으며 경제가 비정상적으로 된다. 쉽게 말해 미국 달러가 부족하면 그렇게 된다. 한국이 지금 외환보유액도 좀 쌓아놓고(2019년 12월 기준 4088억 달러), 비상시 다른 나라의 돈과 우리 돈을 사전에 정한 환율로 교환해 쓰는 약속(통화스와프, 한국은행)도 해두고 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대외적으로 경제 신뢰가 무너지면 다 헛일이 될 수도 있다.

북한도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을까. 북한 같은 국가주도의 계획경제도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식량과 에너지를 비롯해 각종 산업 기자재들을 수입해야 한다면 외화는 필요하다. 외화라는 게 아직까지 뭐라 해도 달러다. 최소한 달러 베이스로 한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어야 외화다.

북한의 외환위기 가능성과 관련해 한국은행이 주목할 만한 보고서를 하나 내놨다. ‘달러라이제이션이 확산된 북한경제에서 보유외화 감소가 물가.환율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긴 제목이다. 평소 신중하기로 정평이 난 한국은행의 보고서답다. 직접적인 메시지대신 간접적으로, 강하고 충격적인 요법대신 부드럽고 우회적으로 내는 게 한국은행의 메시지 전달 전통이다. 경제도, 금융도, 외환도 그렇게 민감하고 정밀한 유기체라는 의미일 수 있다.

핵심 요지는 북한도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고, 어쩌면 멀지 않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에 대한 국제 제재가 서서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북 제재는 유엔이 주체이며, 만장일치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국이 주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달러라이제이션’은 한 나라의 화폐가 달러(미국 달러)로 대체되는 현상을 말한다. 자국민의 신뢰를 잃은 통화가 나라밖에서는 그냥 휴지보다 못한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화폐는 국가가 구축한 최상의 신뢰체계’라고 일찍이 독일철학자 임마뉴엘 칸트는 말했다. 국방체계, 검찰.경찰의 사법체계, 교육체계, 전염병 막는 보건체계 등 무수한 행정시스템 가운데 화폐제도가 가장 중하고 최고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국민들로부터 외면를 받는다? 정상 국가가 아닌 것이다. 반쯤은 거들 난 저급 국가에서 달러라이제이션이 나타난다. 북한의 달러라이제이션 비율이 80%를 넘는다는 분석(KDB미래전략연구소 한반도신경제센터, 2019년5월)도 있다. 한때 북한처럼 교조적 사회주의 공산국이었던 베트남도 이 비율이 10%를 밑도는 것과 비교하면 북한의 경제 실상이 어떤지 알만하다. 말끝마다 반미를 외치지만 경제적으로, 통화 화폐로는 미국에 예속된 것 아닌가.

한국은행은 이 보고서에서 지금 당장 북한이 외환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달러가 부족하면 물가와 환율이 치솟게 되는데 적어도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보유 달러가 줄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앞으로 위기가 올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보유달러는 총 30억1000만~66억3000만달러(2014년)으로 추정됐다. 한국의 100분의 1쯤 되는 셈이다. 이중 ‘가치저장용’, 즉 개인들의 장롱속 달러가 20~43억달러로 ‘거래용’보다 더 많다고 한다.

국제제재로 북한으로 들어가는 달러 유입줄이 계속 죄여지면 북한은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외환위기로 내몰릴 수 있다. 첫 단계가 초기의 가치저장용 외화 감소와 거래용 외화의 일부가 감소하는 중간 과정을 거쳐 거래용 달러까지 줄어드는 마지막 단계다. 아직은 초기단계이지만 2017년 제재조치 이후 매년 20억달러 가량씩 줄어들고 있어 ‘위험 국면’으로 몰리는 것이다. 주시할 것은 북한의 물가와 내부 환율이다. 여기에 급변동이 있으면 위기로 진행이다. 식량과 최소한의 원유, 기본 의약품을 물론이고 미사일 소재 부품까지, 현대사회에서 달러 없이 가능한 게 있을까.

문제는 이런 고비에 우리 정부가 남북경협 카드를 빼내들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새해 들어서는 북한으로 개별관광을 허용하자고 나섰다. 북한의 상황을 모르고 추진한다면 무지 무모한 것이고, 이런 사정을 잘 알고 한다면 궁지로 몰리는 북한을 엄청나게 돕는 게 된다. 북한핵이 폐기되기는커녕 전달체인 미사일까지 한층 성능을 높이면서 발전해나가는 상황이어서 더욱 어이가 없다. 그렇게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니 혹은 ‘PVID(영구적이며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라더니 정책기조가 갑자기 바뀌기라도 했나.

북한에 대한 어떤 물리적 위협보다 경제제재가 효과적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이 핵폐기 대화에 응했던 것도 제재 때문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개별관광으로 달러가 얼마나 들어가겠냐고? 수백달러씩의 입장료와 일반 여행 경비 등으로 1인당 1000달러만 쓴다고 쳐도 연간 10만명이 가면 1억달러(1180억원)이고 20만명이면 2억달러(2360억원)이다. 북한의 경제규모나 달러보유 상황에서는 엄청난 돈이다. 관광객 안전 문제 등은 별개로 치더라도, ‘북핵폐기를 포기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