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이희호 여사 '97년' 발자취
10일 오후 11시 37분 노환으로 별세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명의 위인을 보낸다"고 표현한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192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외가에서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 여사는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부친 이용기씨는 세브란스의전(현재 연세세브란스병원)을 나온 의사였다. 이 여사는 명문 이화여고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유학을 마쳤다. 귀국해서는 YWCA 총무로 사회활동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지인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의 인연은 10년 뒤 1962년 맺어졌다. 첫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결혼하면서 '영욕(榮辱)의 반세기'를 함께하게 된 셈이다.

이 여사의 선택에 대해 주위의 반대는 거셌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하며 어려운 생황을 하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의 상황을 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특히 김 전 대통령에게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김홍일·김홍업 전 의원)도 있었다. 이 여사를 아끼는 YWCA와 여성계 선후배들이 이 여사를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여사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 여사는 향후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모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며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 썼다.

결혼 이듬해에 막내 홍걸씨(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가 태어났고, 이후 10년여간의 결혼 생활은 순탄했다. 김 전 대통령은 3선 의원으로 성장했고 1971년에는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을 정도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배한 김 전 대통령이 정적으로 몰리면서 고난의 시기가 계속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미국 망명길에 올라 1982년까지 떠돌았다. 이 여사는 이 기간을 "외롭고도 잊혀진 곳에 있었던 세월"이라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이 여사는 영부인에 올랐다. 이 여사는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확인해 김 전 대통령에게 조언할 정도로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다했다. 2000년 김 전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도 이 여사는 함께 했다.

영부인의 역할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여성 운동가이자 인권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고, 각종 여성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도 헌신했다.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9월 김대중평화센터 2대 이사장을 지냈고, 2015년 93세의 나이로 세 번째 방북길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사회적 문제가 된 '미투 운동'에는 피해자들에게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 여사가 별세한 것과 관련해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그는)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했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 장지는 서울 국립현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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