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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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6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원을 선고하면서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법원은 이 수첩을 당사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 등이 담긴 '직접 증거'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다만 수첩에 기록된 대화가 있었다는 '간접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정황 증거'로는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이 수첩은 판례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직접 증거로는 사용할 수 없다"며 "그러나 그런 대화 자체가 있었다는 간접 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로는 증거능력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수첩을 통해 박 전 대통령과 기업 총수들의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확인됐다는 의미다. 간접 증거를 통해 범죄를 구성하는 주요 사실의 전제로 삼거나 범죄가 성립한다고 추인할 수 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2014년∼2016년 작성한 63권 분량의 수첩은 박 전 대통령이 그에게 내린 지시 등을 받아적은 내용이다.

지시 중에는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각종 불법 청탁을 한 정황이나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와 독대 자리에서 나눈 대화 등을 추정케 하는 내용이 담겼다.

안종범 수첩은 국정농단을 증명하는 스모킹 건으로 불리며 핵심 증거로 떠올랐다. 반면 박 전 대통령 측은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인해왔다.

이날 재판부는 "안종범은 피고인(박 전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과 면담한 이후 자신을 불러 대화 내용을 불러줘 적어두었다고 진술했다"며 "이는 피고인과 개별면담자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간접 사실에 해당하고, 수첩은 그런 간접 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로 사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774억원 강제 모금 혐의, 롯데 뇌물 혐의 등이 인정된다고 밝히며 안 전 수석의 수첩을 그 근거로 예시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1·2심, 이화여대 입시 비리사건 1·2심도 수첩을 증거로 채택했다. 박 전 대통령 재판부인 형사22부도 앞서 최씨 조카 장시호씨, 광고감독 차은택씨, 최순실씨의 1심에서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2심 재판부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첩에 적힌 '엘리엇 방어 대책', '동계스포츠 선수 양성, 메달리스트', '금융지주, 삼성 바이오로직스, 재단, 승마, 빙상' 등의 내용이 범죄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수첩이 간접 증거로 사용될 경우 우회적으로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같은 수첩이라도 피고인과 혐의에 따라 효력 판단에 차이가 생긴 것으로 풀이된다. 증거자료의 증거능력과 증명력의 차이에 대한 판단이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증거능력은 엄격한 증명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 자격이다. 법에 요건이 정해져 있다. 증거능력이 없으면 증거로 쓸 수 없다. 증거능력이 인정되면 증명력(혐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의 실질적 가치)을 따져보고 유무죄 판단에 활용하게 된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경우 최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한 '민원'이나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최씨를 도와주라고 한 내용 등 본인들과 관련된 직접적·구체적인 내용이 수첩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재판부가 이들을 공범으로 판단한 점 등에 비춰볼 때 수첩의 증거능력이 당연히 인정된다는 게 법원 판단이다.

이 부회장 사건의 경우 2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에 적힌 내용이 객관적 일정이나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기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내밀한 독대에서 나눈 얘기까지 직접 증명하는 자료가 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그에 관한 내용을 추정케 하는 간접 증거로도 쓸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법조계에서는 이날 박 전 대통령 1심의 수첩 증거능력 판단이 이 부회장의 상고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한경닷컴 뉴스룸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