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에서 불거져 전 정권 실세들의 줄구속을 몰고온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실체 규명이 급물살을 탄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한 인사의 폭로였다고 한다. 당연히 폐기됐을 것으로 여겨졌던 블랙리스트 관련 회의 자료를 누군가가 국회로 들고옴으로써 사실관계의 전모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의원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치권 주변선 “믿을 사람이 없다. 무서운 세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한 야당 중진은 최근 기자와 만나 “누군가가 국정조사특별위원회로 지난해 이뤄진 블랙리스트 관련 회의 자료를 가져왔다”며 “이를 통해 블랙리스트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중엔 회의 자료 폐기를 논의한 내용도 들어있어 의원들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회의 참석자 등 모두가 자료가 폐기된 걸로 알고 있었지만 그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니 충격을 받을만하다.

이 중진은 “블랙리스트 관련 회의자료 전체를 폐기하기로 했음에도 자료가 다 폐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정권교체 등에 대비해 자기 살 길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곁들였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등은 초반 국조특위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김 전 실장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고, 조 전 수석은 막판에 두루뭉실하게 ‘블랙리스트’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을 시사한 게 전부였다. 현재 두 사람 모두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폐기되지 않은 전 정권 자료 논란은 최근에도 있었다. 청와대는 얼마전 ‘전 정권 청와대서 일한 사람들이 기록한 각종 비공식 자료들이 청와대 캐비넷에 있었다’며 이를 일부 공개했다. 청와대 보좌진의 방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전 정권 인사들은 “모든 비공개 자료는 폐기했다”고 주장한다. 전 정부에서 일한 한 인사는 “청와대 자료 중 공개자료는 법에 따라 보관되고 개인 자료는 다 폐기하는 게 관례”라고 지적했다. 폐기했다는 자료들이 어떻게 남아있을까. 서로 말이 다르니 아리송하다. 가능성은 두가지다. 전 정부 사람들이 폐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누군가 자료를 의도적으로 남겨놨을 가능성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무서운 세상”이라며 혀를 찬다.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들을 믿고 비밀리에 민감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언제든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불리한 상황에 대비해 자료 등 근거를 남겨놓는 행위가 앞으로도 되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한 관계자는 “각종 비공개 회의자료가 언제든 공개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며 “폐기를 지시해도 누군가 이를 남기려하면 막을 방법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불신이 점점 커가는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재창 정치선임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