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보장 약속하며 대화 1차 조건으로 핵·미사일 실험 중단 제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8일(현지시간) 홍석현 대미특사에게 분명한 어조로 북한의 체제 보장을 약속한 것은 '최대 압박과 관여'라는 이름의 트럼프 대북정책에서 '관여' 쪽 메시지로 볼 수 있다.

특사단 관계자에 따르면 틸러슨 장관은 현 단계에서 대북 군사행동을 상정하지 않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정권 교체와 침략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틸러슨 장관은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 "뒤에서 물어오지 말고 우리를 한번 믿어달라"며 다소 파격적인 '호소 톤'의 메시지를 내 놓기도 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는 북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북한 비핵화임을 분명히 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또한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체제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한다'거나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펴는 한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등의 북한 레토릭에 대한 반박이기도 했다.

이미 틸러슨 장관은 지난 3일 국무부 직원 대상 연설에서도 "북한의 정권 교체, 체제 붕괴, 통일 가속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홍 특사에게 한 발언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화성-12 발사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 강화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 나왔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미국이 대화 기조로 급선회한 것으로 보기는 무리라는 견해가 많다.

틸러슨의 발언을 직접 들은 특사단 관계자도 미국의 대북 대화 조건이 완화된 것 아니냐는 관측에 대해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핵 실험 중지보다 핵 폐기가 확실하다"면서 "어떤 조건의 기준을 낮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도 19일 "미국 정부의 제재·압박 중시 기조가 변한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다만 북한이 비핵화를 선택하면 '다른 길'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틸러슨 장관이 "핵 실험, 미사일 실험 중지를 행동으로 보여야지 뒤로 북한과 대화를 해나가지는 않겠다"며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지를 대화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점은 흥미롭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3월 방한 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해야 대화를 하겠다며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제시한 바 있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화 재개 조건을 밝힌 셈이었다.

특사단 관계자도 "미국의 1단계 목표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할 경우 미국도 대화를 검토할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진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기류인 것이다.

대북 대화의 조건을 둘러싼 미국 고위 당국자의 발언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면서 외교가에서는 북미대화의 순간이 조금씩 다가오는 징후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틸러슨 장관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공영 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 북미대화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방법일 것"이라며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희망대로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할지 장담키 어려워 보인다.

중국의 대북 원유 공급 중단과 같은 '철퇴'가 내려질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는 망설일지언정 중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와 같은 중·저강도 도발은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완전한 핵무기 실전배치라는 지상 목표하에, 설사 제재를 견디다 못해 협상에 나서더라도 그때까지의 핵무기와 운반수단의 역량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김정은의 확고부동한 전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동해상에서 우리해군과 연합훈련을 하고 있고, 내달 초에는 로널드 레이건호까지 합류할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북한이 전격적으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작다.

외교가는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이 완전한 북한 핵 폐기라는 목표를 낮추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게 함으로써 대화의 여건을 만드는 데 있어 한국 정부의 역할이 작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압박 흐름을 유지하는 한편 미미하게나마 움트고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살려낼 수 있는 창의적인 외교가 새 정부에 요구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jh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