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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평화시위' 기조 유지…분노를 웃음으로 승화

춥고 눈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도 들불처럼 타오른 촛불을 끄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5주째 이어진 26일 서울 도심 촛불집회에는 주최측 추산 150만명(경찰 추산 27만명)이 운집했고 전국적으로는 총 190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여들었다.

이는 3차 촛불집회의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과 1987년 6·10 항쟁의 1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해야 매 주말 반복되는 촛불집회가 끝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 다다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 "대통령 불통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불러…하야해야 끝난다"

당초 한 달 넘게 지속하는 '최순실 게이트' 이슈를 향한 피로가 누적되고, 며칠 전부터 집회 당일 영하에 가까운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나오면서 결집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23일 열린 5차 촛불집회 계획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주최 측도 기상 악화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한 관계자는 "날씨 얘기는 기사에 넣지 말아달라"며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150만명(주최측 추산)의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언 손을 녹였다.

그만큼 박 대통령을 향한 분노가 크다는 방증이다.

하야하지 않으면 싸움을 끝내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박 대통령에 대한 '의심'이 '합리적 의심'을 거쳐 점차 '확신' 쪽으로 바뀌어 가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사를 거부하는 등 불통 행보를 보이자 국민의 분노가 증폭될 대로 증폭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는 "검찰 수사로 국민이 의심한 것들이 더 확실해진 상황인데 청와대의 반응은 전혀 없다시피 한 상태"라면서 "뭔가 납득이 되고 설득이 돼야 멈출 수 있는데 지금은 (분노가) 더 강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박 대통령이 전혀 노력을 보이지 않아 그가 정말 하야해야 한다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 같다.

이제는 소통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면서 "어제는 국민의 '심리적 디데이(D-day)'였던 셈"이라고 규정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은 "국민이 눈비 맞으며 호소했는데 계속 버틴다면 '박 대통령 당신은 국민도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될 것"이라면서 "이대로 가면 더 추워질 내달 3일에 또 집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사상 첫 '청와대 포위행진'…연행자 '0명'

이날 본 집회에 앞서 오후 4시께부터 세종로사거리를 출발해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삼청로 세움아트스페이스 앞, 신교동로터리 등 청와대 인근을 지나는 3개 경로로 사전행진이 진행됐다.

청와대를 동·남·서쪽으로 포위하듯 에워싸는 '청와대 인간띠 잇기'가 처음으로 실현됐다.

특히 서쪽 신교동로터리는 청와대에서 약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회와 행진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평화로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경찰에 연행된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과거 과격한 양상으로 흐른 집회는 결국 '폭력시위'라는 프레임에 갇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 같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폭력집회에 대한 거부감과 평화시위를 국민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평화집회'가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오면서 과격 집회가 설 자리를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참가자가 소수화될수록 집회 성격이 더 치열해지고 과격해지는 반면, 다수일수록 더 평화적이고 온건한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면서 "굉장히 정치적인 이슈임에도 전례 없이 많은 사람이 동참하면서 평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한 참가자들 가운데 일부는 제한 시간 이후까지 남아 청와대를 향해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이들을 인도로 밀어 올리는 데 주력하고, 충돌은 가능한 한 피하는 모습이었다.

안 처장은 "경찰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불필요하게 과도한 진압을 하지 않는 등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계속된 '축제'…풍자와 해학으로 인내

집회는 박 대통령 비판 영상, 시민들의 시국 발언에 공연이 더해지면서 진지하면서도 흥겨운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뮤지컬 배우들과 시민단체 인사, 가족과 참가한 중학생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험악한 구호보다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를 풍자하는 피켓들이 훨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참가자들은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도 보여줬다.

'민주묘총', '얼룩말연구회', '화실련(화분안죽이기 실천시민연합)' 등 기상천외한 단체 이름이 쓰인 깃발이 나부꼈고 시민들은 이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곽 교수는 "부정적인 정보보다 재미있고 풍자적인 정보에 뇌가 더 많이 반응하게 돼 있다"면서 "집회에 나가면 재미있고 즐거워서 사람들이 더 모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경쟁과 생존에 대한 부담이 커진 우리 사회에서 묻혀있던 개성과 각자의 정체성이 광장에서 드러난 것"이라면서 "'동질성'이 아닌 150만 각자의 '색깔'이 모두 표현되며 단합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대한민국 시민혁명이 축제로 진행되고 있다.한국 시민의 위대함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연합뉴스) 안홍석 박경준 기자 ah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