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의 논점과 관점] 최순실 쓰나미에 놓친 것들
확실히 한국인에겐 쏠림의 DNA가 있는 것 같다. 좋게 보면 신명이지만, 나쁘게 보면 냄비 근성이다. 최순실의 태블릿PC 등장 열흘 만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송민순 회고록도 묻혔고, 블랙홀이라던 개헌론마저 쏙 들어갔다. 포털은 ‘비선, 농단, 탄핵, 하야…’ 등 낯선 단어들로 어지럽다. 최순실과 무관한 인물 또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면 대뜸 ‘파문을 덮으려는 음모’라는 댓글이 쏟아진다.

우리 사회의 쏠림은 거의 일상이다. 인구 5000만명에 툭하면 ‘1000만 영화’다. 책이 안 팔리는데 ‘밀리언 셀러’들이 나온다. 광고모델로 한 번 뜨면 ‘OO의 하루’를 구성할 만큼 싹쓸이하기 일쑤다. 연예인의 사생활은 ‘초딩’들도 꿰고 있다. 6000개 매체가 종일 쏟아내니 외면할 길이 없다. ‘알 권리’가 넘쳐 ‘모를 권리’가 침해받는 판이다.

100년 전에도 비판받은 쏠림 DNA

요즘 갑자기 쏠림이 심해진 것도 아니다. 이미 한 세기 전에 단재 신채호가 신랄하게 질타했다. “한 사람이 떡장사로 흥했다면 온 동네에 떡방아 소리가 난다.(…) 이조 오백년 동안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 되풀이요, 학술은 심(心)·성(性)·리(理)·기(氣)의 강론뿐이니(…) 이렇게 단조(單調)이고 맹종부화(盲從附和)하는 사회가 어딨나.” 단재가 아니었다면 ‘한국인 비하 발언’이라고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쏠림의 맨 앞에 센세이션을 먹고사는 미디어가 있다. 대중이 쏠리면 언론이 중심을 잡기는커녕 더욱 가속페달을 밟는다. 그런 언론에 최순실만한 대박 호재도 없다. 만인이 궁금해할 궁중비사와 권력비화에다 막장 요소까지 두루 갖췄다. 공영방송조차 메인뉴스 3분의 2가 최순실 뉴스다. 신문은 1면부터 매일 10여개 면을 도배한다. 그의 벗겨진 신발 한 짝도 주요 기사다. 다른 중요한 뉴스는 없나. 아니 볼 필요도 없다는 건가.

최순실 사건은 수사를 통해 뭐가 사실이고 뭐가 ‘카더라’였는지 드러날 것이다. 검찰도 이참에 못 밝히면 덤터기를 쓸 테니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확 쏠린 통에 간과하고 있는 건 없는지.

온통 최순실 블랙홀에 빠진 동안 세계는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시진핑은 6중전회에서 ‘시황제’급으로 격상됐다. 아베는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일본 언론들은 벌써부터 다음달 초 한·중·일 정상회담을 걱정한다. 자칫 중·일 회담으로 축소할 수도 있다는 복선이다. 북핵, 사드, 남중국해 등 난제에다 김정은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한국만 왕따가 돼도 괜찮은가.

국제뉴스엔 깜깜한 섬나라인가

엿새 남은 미국 대선도 요동친다. 그간 한국 언론만 보면 클린턴의 낙승에다 ‘트럼프=또라이’였다. 그러나 트럼프의 숨은 지지자(Shy Trumper), 클린턴의 이메일 게이트로 인해 전혀 딴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헌데 한국의 정치권은 아무 대비도 안 보인다.

브렉시트는 ‘미친 짓’으로 치부됐다. 한국 언론만 보면 영국은 벌써 망했어야 했다. 헌데 영국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심지어 영국이 유럽연합(EU)의 대표 규제인 GMO(유전자변형식품)를 허용하겠다는 중대 뉴스조차 국내에선 보기 힘들다. 한국 언론은 대형 오보를 날려놓고 그런 줄도 모른다.

물론 최순실 사건은 천인공노할 만하다. 하지만 세계가 질주하는데 한국만 막장 드라마에 빠져 눈 감고 귀 막고 있을 때인가. 원로의 일침도, 싱크탱크의 비상벨도 꺼진 지 오래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이 외딴 섬나라 같다. 정말 여기까지인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