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치' 실험 성공할까…야권 재편 등 과제 산적

4·24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안철수(51) 의원은 의사, 경영자(CEO), 교수에 이어 '국회의원'이라는 네번째 직업을 갖게 됐다.

지난해 대선 출마를 통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던 안 의원은 이제 국회에 입성함으로써 자신이 기치로 내건 새 정치를 여의도에서 시험할 기회를 거머쥐었다.

'청춘콘서트'로 인기몰이를 했던 안 의원에게 바야흐로 '여의도 콘서트' 시대가 열린 셈이다.

안 의원은 부산에서 태어나 평범하고 내성적인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을 정도의 '책벌레'였다고 한다.

그는 의사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 재학 중에는 의사가 아닌 연구의를 택했다.

병의 원인이나 치료방법을 발견하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느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과 달리 안 의원은 학창 시절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구로동과 두메산골 무의촌에서 무료 진료를 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의학실험을 더 잘하기 위해 컴퓨터를 배웠는데, 자신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하면서 백신과 인연을 맺었다.

의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백신 무료 배포에 전념했다.

군 제대 후에는 안철수연구소를 창업, 기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2004년 안철수연구소가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로서 가장 높은 매출 및 수익을 올린 상황에서 안 의원은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뒤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를 받고 카이스트 교수를 지내다 2011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9년 6월 MBC TV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전국적 인지도를 높였고 2011년 9월까지 청춘콘서트를 진행해 청년들의 '멘토'로 이미지를 넓혀갔다.

그런 그가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계기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다.

그의 당선은 유력해 보였으나 당시 낮은 지지율에 갇혀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직을 아무 조건 없이 전격 양보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아름다운 양보'로 회자된 그의 '결단'은 기성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안철수 현상'으로 단숨에 번져나갔다.

급기야 잠재적 대권 후보로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존재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박근혜 대세론'을 깰 수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주목을 받았다.

안 의원은 정치 참여에 대한 고심을 거듭한 끝에 지난해 9월 19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며 대선 완주의 뜻을 밝혔고 실패하더라도 정치인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안 의원이 기치로 내건 '정치혁신'이 정치권의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여야가 국회의원 세비 삭감, 의원 겸직 금지 등을 약속하는 등 쇄신 경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안 의원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야권후보 단일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대선 예비후보직을 사퇴, 대권도전의 여정을 66일만에 마감했다.

문 후보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벌인 뒤 대선 당일 미국으로 출국한 안 의원은 지난 달 11일 귀국,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를 전격 선언하면서 정치적 재기에 나섰다.

마침내 40일 가량 '새정치의 기치'를 다시 올리고 선거운동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국회의원으로 '정치 2막'을 열게 된 안 의원은 이제 현실정치에서 '새 정치'의 실체를 어떻게 보여주며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냐는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300인 가운데 한명에 머무르게 될지, 차기 대권주자로 우뚝 서는 1인이 될지는 그가 앞으로 연주해갈 `여의도 콘서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렸다.

(서울연합뉴스) 이유미 기자 gatsb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