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부실과 금융감독원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이 비등했던 2011년 5월4일 오전 7시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은 “금융감독원을 방문할 테니 준비하라”고 경제수석실에 갑작스레 지시했다. 출발 전 본관 집무실에서 참모들을 맞은 이 대통령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는 당초 태극기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다가 한 참모의 조언으로 태극기가 없는 감색 점퍼로 갈아입은 뒤 17인승 버스를 타고 금감원으로 향했다.

오전 9시 여의도 금감원 건물 정문 앞엔 김석동 금융위원장, 권혁세 금감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 이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9층에 마련된 회의장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금감원 간부들은 두 손을 모으고, 마치 ‘죄인’처럼 서 있었다. 권 원장이 자체 쇄신방안을 보고했지만, 이 대통령은 ‘믿지 못하겠다’며 물리쳤다. 그러면서 “용서받기 힘든 비리를 저지른 걸 보면서 저 자신도, 국민도 분노에 앞서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질책은 25분 동안 이어졌고, 이 대통령은 누구와도 악수하지 않은 채 회의실을 나왔다.

이날 ‘대통령의 진노’로 국민들의 머릿속엔 ‘저축은행 부실=금감원의 책임’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저축은행 부실 사태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를 관통해 이어져 내려온 정책 실패와 부실감독, 늑장처리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는 지적이 많다.

◆‘위기 극복’에 뒷전으로 밀려

MB정부 출범을 앞둔 2007년 말 저축은행 상황은 어땠을까. 2002년 말 25조5000억원이던 저축은행의 총자산은 불과 5년 만에 2배가 넘는 58조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잇따른 규제 완화 때문이었다. 정부가 2005년 12월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M&A)을 허용하고, 이듬해 ‘88클럽’(고정이하 여신비율 8% 미만이고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이 8%를 넘는 저축은행)에 여신한도 규제를 완화해준 덕에 저축은행들이 몸집을 불린 것이다. 저축은행들은 여신한도가 늘어나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앞다퉈 나섰다. 2005년 말 5조4000억원이던 PF 대출 잔액은 2010년 말 12조2000억원까지 늘었다.

노무현 정부의 저축은행 규제 완화는 MB정부엔 큰 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2009년까지만 해도 저축은행의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 내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2009년 2월~2010년 4월)을 지낸 임종룡(현 국무총리실장)의 회고. “이명박 정부 초기엔 부실이 불거지지 않았다. 또 2009년 말까지는 리먼브러더스 쇼크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올인’했다. 저축은행 문제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청와대 ‘공자금 투입’에 부정적

안으로 곪아가던 저축은행 부실의 일각이 드러난 때는 2009년 12월 전주의 전일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되면서부터다. 금융위원장(2009년 1월~2011년 1월)을 지낸 진동수의 회고. “2009년엔 그렇게 썩어가는 줄 잘 몰랐다. 금감원에서도 상세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일저축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2010년부터는 뭔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진 위원장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11년 4월 열린 국회 ‘저축은행 청문회’에서 “공적자금 조성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는 상당한 공감이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 진 위원장의 ‘공적자금 투입론’은 경제팀 내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청와대 정책실장(2010년 7월~2011년 12월)이었던 백용호의 증언. “진 위원장은 공적자금을 넣자고 했지만 최중경 경제수석과 나는 반대했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세금이다. 따라서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우선 대주주가 증자와 자산매각 등 자구노력을 해야 하고, 그 다음 예금보험기금으로도 안 되면 공적자금을 넣는 게 순리다.”

◆경제팀 불협화음도 사태 키워

MB정부가 저축은행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친 데는 진 위원장과 최 수석의 불편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최중경은 2004년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시절 역외선물환(NDF) 시장 개입에 나섰다가 1조8000억원에 이르는 환차손을 입고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있다. 당시 재경부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이던 진동수는 최중경을 불러 심하게 나무랐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가 틀어졌다고 주변에선 말한다.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의 증언. “두 사람의 관계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서로 선후배로 생각도 안 할 정도였다.”

진 위원장은 처음엔 최 수석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진동수의 증언. “최 수석이 취임했을 때 만나서 ‘우린 한배를 탔다. 열심히 도울 테니 잘 해보자’고 했다. 최 수석이 외환건전성 부담금 등 ‘자본 유출입 규제 3종 세트’를 주장할 때도 난 찬성했다. 그가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축은행 구조조정용 공적자금 조성을 대통령께 보고해야 할 최 수석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진 위원장의 주변 사람들은 “그나마 소통이 됐던 윤진식 정책실장이 2010년 5월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나고, 그 자리에 백용호 정책실장이 온 것도 진 위원장에겐 부담이었다”고 말한다. “윤 실장이 떠나면서 청와대에 진 위원장의 우군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윤증현 재정부 장관이 적극 도와준 것도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공교롭게도 경제부처와 청와대 간 의견조율이 이뤄지는 ‘서별관회의(비공식 경제장관회의)’도 2010년 하반기엔 거의 열리지 않았다. 두 달여에 걸쳐 서별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된 탓도 있지만, 최 수석이 진 위원장과의 만남 자체를 꺼렸던 이유도 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진 위원장은 자신의 정책 구상이 먹혀들지 않자 10월 말께 임태희 대통령실장을 직접 찾아가 “도저히 최 수석과 호흡을 맞춰 일을 못하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진 위원장과 최 수석은 결국 2011년 1월 초 모두 교체됐다. 저축은행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도 교체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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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과 소규모 기업의 금융 편의와 저축 증대를 위해 설립된 금융회사. 1972년 ‘8·3 긴급경제조치’에 따른 사(私)금융 양성화 방안에 따라 ‘상호신용금고’로 출발했다. 2001년 3월 상호신용금고법이 개정돼 2002년부터 상호저축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금을 받아 대출해 주는 여수신 업무를 한다는 점에서 은행과 비슷하다. 예금자 보호도 받는다. 예금자 보호 한도는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1인당 2000만원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엔 한시적으로 전액 보호했고, 2001년부터는 5000만원으로 확대됐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기준에 미달하면 금융당국은 수준에 따라 경영개선 권고(5% 미만), 경영개선 요구(3% 미만), 경영개선 명령(1% 미만) 등 ‘적기시정조치’를 내린다. 경영개선 명령을 받으면 6개월 이내에 영업정지를 비롯해 제3자에 의한 인수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 절차에 들어간다. 규제 완화로 몸집을 불려온 저축은행들은 부동산 PF 부실 등으로 2011년 이후 대규모 퇴출을 면치 못했다.

특별취재팀 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 mbnomic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