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 전략이 '통미봉남(通美封南:미국과는 대화하고 남한과는 대화하지 않는 것)'에서 '통민봉관(通民封官:민간과는 대화하고 당국과는 대화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고 있어 주목된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5개 남북 교류사업에 대해 '전격 합의'를 도출하자 이 같은 관측이 나오고 있다.

5개 합의 사항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재개 △백두산 관광 등은 우리 정부의 허가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한 사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민간 사업자인 현대그룹과 공동 합의문을 발표,그 의도를 의심케 하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통미봉남 전략으로 남한 당국을 고립시키려던 북한의 전략이 한발짝 나아가 통민봉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관측했다. 다시 말해 북한 정부는 '6 · 15 공동선언 및 10 · 4선언'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민간을 매개로 남북 관계에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현대그룹을 매개로 통민봉관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2차 핵실험 이후 국제적인 고립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북 · 미 간 대화 국면을 이끌어내야 하는데,이 과정에서 남북 관계도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측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공을 우리 정부 측에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이후 '북핵 포기 없이는 어떤 지원도 없다'며 대북 강경 기조를 유지해 왔다.

북측은 이 같은 우리 정부와의 직접 대화를 피하면서도 현대를 통해 우회적으로 남한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도 남북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측의 통민봉관 전략 탓에 이번에도 답답한 쪽은 우리 정부가 될 공산이 크다. 정부는 이번 합의를 일단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북 당국 간 대화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고민도 커질 전망이다.

정부가 양측의 합의 사항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거부할 경우 대내외적으로 "남측이 경색 국면을 주도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순순히 들어주면 "북한에 끌려간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현대그룹을 매개로 한 '통민봉관' 전략은 북측으로서는 손해볼 게 없는 게임"이라고 진단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