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전술적 유연성 발휘해야

북한의 6자회담 거부 의지가 거듭 확인되면서 지난 6년간 한반도 비핵화를 지향하며 진행돼온 6자회담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의 권력서열 2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15일 이집트에서 열린 제15차 비동맹운동(NAM) 정상회의에 참석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세계 각국의 지도자 등 118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5자회담에 더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앞서 북한은 지난 4월14일 외무성 대변인과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앞세워 6자회담 '절대불참'을 발표하고 기존 6자회담 합의에 구속되지 않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6자회감 거부 명분은 단순하고 익숙하다.

6자회담의 핵심 상대국인 미국이 자신들에 대한 '적대적 행동들'을 서슴지 않으면서 '심각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6자회담 합의의 정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김영남 위원장은 "주권과 평등에 대한 존중 원칙이 부정되는 곳에서는 대화가 있을 수 없고 협상도 있을 수 없다"면서 "(6자)회담은..미국과 그에 순응하는 회담 참가국 중 다수가 이 원칙을 포기했기 때문에 영원히 끝났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그는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부는 핵 억지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런 행보에 대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미국과의 관계설정을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는 곧 조지 부시 행정부 당시 북.미 관계를 규정했던 6자회담을 거부하고 새로운 협상틀을 추진하겠다는 수순으로 읽힌다.

6자회담이 태동하던 당시 사정에 밝은 전직 고위당국자는 16일 "애초 북한은 6자회담 참여를 극구 꺼리다가 '북.미 양자접촉의 허용'을 전제로 한 중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6자회담에 참여한 바 있다"면서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직접 협상이 가장 원하는 협상방식일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향후 상황의 변화에 따라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기존에 유지돼왔던 6자회담은 다시 추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관건은 북한의 6자회담 거부에 미국과 중국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다.

현재 미국 내에서도 그동안 운영돼왔던 6자회담의 형식이나 내용 등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때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제기했던 '북한을 뺀 5자회담' 구상도 사실은 미국 정부와 관련 깊은 한 싱크탱크의 구상이었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하지만 6자회담 틀의 와해를 우려하는 중국의 강력한 견제 속에 이 아이디어는 사실상 현실화되지 못하고 무게감을 잃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아무리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북한을 6자회담에 복귀시키지 못할 경우 6자회담의 유용성은 소멸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는 중국의 위상 등을 의식해 6자회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6자회담의 내용성과 북한의 의무를 보다 구체적이고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향으로 비핵화 협상이 진행돼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14일 폭스뉴스에 출연, "북핵문제는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북한과의 문제"라고 다자형태의 협상을 강조하면서 "만약에 6자회담이 다시 열린다면 반드시 시한을 정해서 해야 하고 북한이 핵무기 능력을 포기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의 발언은 현재 미국내 여론이 북한 핵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심지어 과거 워싱턴의 강경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폐기'라는 문구가 최근 오바마 행정부 고위관료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15일 미 외교협회(CFR)에서 행한 미국의 외교정책 관련 연설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향한 더욱 터프한 공동 노력이 장기적 결과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기회에 내가 일본, 한국, 러시아, 중국의 카운터파트에게 말했다"면서 "그들(카운터파트)의 우려를 해소하고 우리의 원칙과 레드라인(한계선)을 명확히 하면서 진전을 추구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 정책을 책임진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는 6자회담과 관련된 미국의 입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다른 확고한 원칙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치게 되면 향후 협상국면이 재개되더라도 그동안의 6자회담과는 맥락이 달라질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분위기다.

다시 말해 6자회담이라는 외형적 틀은 유지하면서도 미국과 북한의 '신속하고 대담한' 협상이 전제되는 새로운 판짜기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은 물론 한반도 문제의 핵심당사국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위상과 역할도 달라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교소식통은 "미국의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북핵 협상의 틀도 변화해왔다"면서 "오바마 정부와 북한의 새로운 힘겨루기 과정에서 협상틀이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한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