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관료로 장관까지 지냈던 분이 요즘 뒤죽박죽이 된 '당정청(黨政靑)의 관계'를 이렇게 개탄했다. "중앙정부의 힘이 수평적으로는 국회로,수직적으론 지방으로 많이 이전됐다. 그러나 힘의 이동이 이뤄진 것과 달리 인재의 이동은 뒤따르지 못했고 모두 제 역할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10여년 전만 해도 중요한 정책은 정부와 여당이 당정회의라는 이름을 통해 조율하면 대충 마무리됐다. 정부가 법안을 만들어 여당에 설명하면 '고통스런 설득 과정' 없이 자구 수정만 거쳐 국회로 나갔다. 야당의 벽만 넘으면 실행에 옮겨졌다.

요즘은 언감생심이다. 장관이 일일이 국회의원을 찾아가 손발을 싹싹 빌면서 협조를 요청해도 될까 말까 한다. 그만큼 국회의 권력이 세졌다.

국회의 힘이 커진 것은 의회민주주의 발전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하지만 태산같이 무거운 권력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거나 만용을 부리는 듯 제멋대로 쓰고 있는 게 요즘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용기간 제한(2년이 되면 정규직 전환)문제도 법 시행이 불과 보름밖에 남지 않았지만 해당 상임위원회에 상정될 기미가 안 보인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미디어 산업의 각종 규제를 완화하려는 미디어 관련법이 'MB악법'이라는 엉뚱한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여당은 국민들을 설득할 요령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툭 하면 거리로 뛰쳐나가는 야당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얼마 전에는 지분제한 완화를 골자로 한 금융지주회사법이 여야 원내대표 간에 합의가 이뤄졌는데도 한나라당 소속 상임위원장이 비토를 놓고 한국은행법 개정은 정부가 하기 싫다는데 야당도 아닌 한나라당 의원 찬성으로 발의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정부와 여당의 이상한 관계는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기업 최고경영자 출신 대통령에게 만나기만 하면 치고 받는 정치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그래서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남의 나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청와대와 여당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나 멀고 먼 당신이 돼 버렸다. 오죽 했으면 여당이 청와대에 오만하다느니, 독선적이다느니 하는 가시 돋친 말을 거침없이 내뱉게 됐을까. 그런 판에 장관들이 여당과 힘을 합쳐 일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미국 TV가 자주 보여주는 대통령의 모습은 법안통과 협조를 얻기 위해 백악관에서 의원들과 아침 식사를 하거나 개별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장면들이다. 빌 클리턴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캐나다,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멕시코의 싼 임금 근로자가 밀려들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지만 교역확대의 혜택이 더 클 것으로 판단했다. 끝까지 반대하는 30명의 의원들이 문제였다. 클린턴은 고심 끝에 의원 한 명 한 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일 대 일 설득 작업을 벌였다. 백악관에서 직접 차를 보내 모셔왔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부와 여당은 손발이 안 맞고 청와대는 여당을 외면하고 야당은 독재시대의 투쟁수단에 의존하고. 당정청의 권력이동에 모두가 적응하지 못한 채 한국은 표류하고 있다.

고광철 부국장겸 경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