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知彼知己).

지난해 연말부터 새해 벽두까지 살벌하게 전개된 이른바 '입법전쟁'이 가까스로 봉합된 상황에서 정치권에 던져진 화두다.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초당적인 난국 타개 방책을 내놓아야 할 국회가 '희대의 난장판'을 연출한 이유를 반성하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지혜로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스스로를 알고 상대도 아는 '지피지기'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여권의 반성에 시선이 쏠린다.

현 시국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자신들의 결집력, 그리고 상대를 인식하는 자세 등에서 과연 여권은 잘못된 점은 없었는가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친이(친이명박)계 재선의원은 "이번 결과를 보면서 총체적으로 참담한 기분이다.

172명 의석 한나라당이 하나라는 말이 허구라는 생각까지 든다"고 자괴감을 토로했다.

현 국면을 '경제위기'로 진단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114개나 되는 법안을 한묶음으로 해서 지난해 연말까지 반드시 처리하겠다며 어감도 이상한 '속도전'을 강조한 여권의 전술도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특히 민생법안속에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논란을 야기할 쟁점법안을 포함시킨 탓에 순수성을 의심받은 형국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남영 세종대 교수는 "정부, 여당은 속도전이라는 말을 자꾸 쓰면서 무엇이든지 빨리 하려고만 한다"면서 "경제는 조심스럽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권의 '지피' 전술도 지적되고 있다.

'좌파 발목잡기'로 인해 새 정부 출범 1년을 허비했다는 여권 핵심부의 인식 속에는 집권 10년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현재의 민주당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박(친박근혜)계 한 초선 의원은 "국회를 불법 폭력점거한 민주당의 행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에너지는 국민통합에서 비롯되는데,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며 포용하려는 자세의 부족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한나라당의 내공도 문제다.

입법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172석이라는 거대 여당이 몸집에 걸맞는 무게감있는 대응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의 중심을 잡는 주류(主流) 세력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많던 '친이계' 인사들은 어디에 있는지,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중진의원들도 무엇을 했는 지 활약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는 물론 2012년이나 돼야 공천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정치일정도 관계가 있지만 그 보다는 어쩔 수 없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웰빙 DNA'에서 초래됐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한 박근혜 전 대표도 입법 전쟁 내내 침묵을 지키다 국면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상황에서 '한마디'를 한데 대한 아쉬운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고언이 이어지고 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여권과 청와대를 향해 '결사항전'을 전개한 상황의 논리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만 극한적인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 이전에 '예방활동'을 얼마나 전개했는지는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다.

'10년 집권'에서 체득한 지혜와 대안제시를 통해 '10년만에 집권한' 한나라당을 견인할 방안을 찾는 노력이 아쉽다는 것이다.

이번 싸움을 통해 172석의 공룡여당의 '일방처리'를 막았다는 전과(戰果)를 거뒀지만 역설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소수 야당'의 한계를 절감한 것은 민주당의 미래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서 "우리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태도에서 벗어나 절충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몸으로만 막으려는 태도는 오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결국 여야 정치권이 이번 입법 전쟁에서 보여준 것은 '자신도 몰랐고, 상대도 모른' 전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정치인들은 개인이나 당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민국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야당의 국회도 아니며 청와대의 국회도 아니다.

이 나라 국회는 바로 국민의 국회임을 모두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자병법(모공편)에 나오는 `지피지기'라는 말 뒤에는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이어진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적의 상황을 모르고 나의 상황만 알고 있다면 한번은 승리하고 한번은 패배한다.

적의 상황을 모르고 나의 상황도 모르면 매번 전쟁을 할 때마다 필히 위태로워 진다.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가 이어진다.

정치권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입만 열면 강조하는 국민을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는 경구로 여겨진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