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의 이경찬(68).영찬(70) 형제는 북측의 숙모 이영희(73)씨와 사촌동생 이영(42)씨를 만난 기쁨도 잠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숙모와 사촌동생을 만나면 반세기 넘게 그리워했던 부친의 행적을 물어보려 했는데 이들이 오히려 부친의 행적을 되물어 왔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서울지검 부장검사였던 부친 주신(96.생사불명)씨는 이른바 전시 납북자다. 공직자 신분으로 피신하지 못한 아버지 주신씨는 변장을 하고 가족들을 수소문하던 중 인민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이후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소문 이외에 경찬씨는 56년동안 부친의 안부를 듣지 못했다. 부친과 함께 행방불명됐던 막내 삼촌 주호(92)씨는 북한에서 결혼했고 1980년 사망했다고 한다. 경찬씨는 전시납북자 가족모임인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이미 여러 차례 통일부를 방문해 북측에 부친의 생사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경찬씨는 1월 공무원 납북자 가족 4명, 일반 납북자 가족 10명과 함께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전시납북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경찬씨는 "생사 여부를 확인해줄 경우 공직자 신분인 부친의 유해송환요구 등 문제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에 속 시원히 말 못하는 것 같다"면서 "전시 납북자도 전후 납북자 못지 않게 중요한 만큼 정부가 나서 하루 빨리 해결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은 제13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최초로 전시 납북자 가족들의 상봉을 특수이산가족 범위에서 추진했다. ○…국군포로 형 가족과 상봉 박영원(74)씨는 형수와 조카를 처음 만나자 형 인하씨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6.25 전쟁때 국군포로로 끌려갔던 인하씨는 사망했고 이날 이산가족 상봉장에는 대신 형수와 조카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7남매의 다섯째인 인하씨는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6.25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오에서 이탈한 인하씨는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내려갔다 인민군에 의해 북측으로 끌려갔다. 영원씨는 "형님은 1998년 돌아가셨다"는 형수 오순봉(68)씨의 말에 "50년 넘게 그토록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됐다"면서 한탄했다. 조카 광수(43)씨가 "고혈압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자 영원씨는 "체력 하나는 끝내줬는데..."라면서 안타까워했다. 영원씨는 전쟁이 끝난 후 형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방부와 대한적십자사, 이북5도청 등에 수없이 문의했다고 한다. 영원씨는 조카가 품속에서 형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아버지 기억나시죠?"라고 질문하자 "형님이 맞네. 형님이 맞아"라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미안하다 이 오빠가 죄인이다" 1.4후퇴 당시 단신으로 남하했던 이순재(71)씨는 "나만 혼자 살겠다고 내려와 가족들과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됐다. 미안하다. 이 오빠가 죄인이다"라면서 여동생 옥정(67).옥자(65)씨의 손을 잡았다. 여동생들은 "괜찮아요.괜찮아요"라며 얼굴을 못 드는 오빠를 끌어안으면서 위로했다. 순재씨는 "전쟁발발 직후 아버지가 돌아간 상태에서 가족들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서 도망쳐 나왔다"면서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휴전 된 상태에서 올라가지 못했다"고 지난 날을 회상했다. 순재씨는 이내 감정을 추스른뒤 옥정.옥자씨의 가족관계와 친척들의 안부를 묻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 18번은 오빠생각" 황해도가 고향인 이완근(66)씨는 1.4후퇴 당시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남긴 채 아버지, 형과 함께 월남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당시 갓 출산한 막내 여동생 산후조리 때문에 피난길에 합류하지 못했다. 완근씨는 북한에 남은 여동생들을 떠올리며 부르던 동요 '오빠생각'이 애창곡이 됐다고 설명했다. 완근씨는 동생 숙자(62)씨를 만난 자리에서 "오른쪽 뺨 아래 흉터가 있는 걸 보니 내동생이 분명하구나"라면서 동생의 손을 잡은 채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완근씨는 이내 눈물을 거두고 숙자씨와 함께 어릴 적 허수아비를 보고 놀라 도망가던 일과 집근처 개울에서 고기를 잡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웃음꽃을 피었다. ○…남측 최고령자, 아들 상봉 이번 상봉행사에서 최고령자 중 한명인 엄순종(93)씨는 55년만에 아들 호연(55)씨를 만나자 눈물부터 흘렸다. 기력이 쇠약해진 탓에 휠체어를 타고 금강산에 온 순종씨는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상봉장 테이블에 앉았다.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엄씨는 1.4후퇴 당시 함흥시내에서 혼자 일을 보러 나갔다가 고향마을에 미군의 폭격이 심해 귀가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엄씨는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못해 모습이 눈에 밟혔다고 술회했다. 그는 북한에 남았던 4명의 아들 중 장남 호길과 차남 호민 등 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눈물을 삼키면서 어깨를 들먹였다. 순종씨가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들고 "이분이 호길, 호민 형님들입니다"라고 말하자 아버지 엄씨는 책상을 치며 머리를 감싸안으면서 오열했다. ○…반세기 만에 두 손 잡은 부부 반세기 만에 맞잡은 부부의 손은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남측의 박상륙(84)씨는 북측의 부인 장용숙(81)씨에게 "임자를 그리워하다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안했어"라고 말했다. 이에 부인 장씨는 휠체어에 앉은 채 눈물만 훔쳤다. 박씨는 장씨와 함께 온 큰 아들 홍식(63).동식(61)씨도 만났다. 환갑이 넘은 아들들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박씨는 남한에서 재혼한 뒤 얻은 딸과 아들의 사진을 보이면서 "아들이 속초까지 배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khm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