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5㎿(메가와트) 원자로 봉인제거에 이어 넘어서는 안될 '금지선'(red line)으로 상정되던 8천여개의 폐연료봉이 보관된 저장시설의 봉인까지 전격 제거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8천여개의 폐연료봉은 간단한 재처리 작업을 거칠 경우 3-4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즉각 추출할 수 있어 북핵사태가 본격적인 위기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북한이 원자로 재가동 준비절차와는 무관한 폐연료봉 저장시설까지 손을 댄 것은 핵무기 개발의도로 해석될 수 있어 북핵사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대응도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폐연료봉 저장시설의 봉인까지 이처럼 빠른 시간내에 제거할 것이라고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우리 정부도 북한이 5메가와트 원자로 봉인을 제거한 뒤 추가조치로는 원자로 재가동을 위한 연료봉 장전 등의 조치를 예상했던 게 사실이고 핵무기 개발의도로 분석될 수 있는 폐연료봉에는 바로 손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추가 봉인제거에 나선 의도는 정확히 파악키 어렵다. 하지만 자신들이 제안한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이 "선(先) 핵폐기가 우선"이라는 미국의 거부로 진전될 전망이 없자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의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북한은 지난 12일 자신들의 핵동결 해제 선언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이 국제사회에 극단적인 위기감이 고조되지 않자 당초 예상과는 달리 폐연료봉 저장시설 봉인제거라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는 북한이 지난 93-94년 핵위기 당시 문제가 풀리지 않자 93년 3월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전격 선언함으로써 일순간에 국제사회의 파문을 낳은 것과 비슷하다. 사실 대북 중유중단 결정 이후 북한이 단계적인 핵동결 해제조치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고, 이에 따라 북한은 자신들의 핵동결 해제선언이나 5메가와트 원자로 재가동 정도로는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고 오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한이 22일 폐연료봉 저장시설 봉인을 제거하면서도 아직 밀폐된 용기에 보관된 폐연료봉 자체를 끄집어내거나 핵재처리시설인 영변 방사화학실험실까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위협의 칼'을 곧추 세우면서도 여전히 미국을 향한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북한의 이중적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사회가 이같은 북한의 극단적인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위협을 사지 않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 또한 확고해 한동안 이번 핵사태는 북미 양측간 물러서지 않는 정면대치 국면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번 사태를 유엔 안보리에 보고할 것이 확실시 되고, 이 경우 유엔은 북핵문제를 정식으로 다루면서 대북 제재결의안 채택 등 압력과 설득을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북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는 부시 행정부에게는 이같은 북한의 극단적 방안선택이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에 따라 북미 양측 사이에 놓인 우리 정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고 대북 경수로 공사중단, 폐연료봉 개봉 등 북미간 `장군멍군'이 이어질 경우 2003년 한반도 핵위기설이 더욱 가시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연합뉴스) 황재훈 기자 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