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8년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97년 15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15번 치러진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직선 8회, 간선 7회로 이뤄졌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196명(재적 197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기명 투표로 실시된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김구(金九) 후보는 13표, 안재홍(安在鴻) 후보는 2표를 얻었다. 발췌개헌을 통해 직선제로 실시한 52년 8월 5일 2대 선거에서 이 대통령은 유효투표의 74.6%를 얻어 재선됐다. 이 대통령은 56년 5월 15일 3대 때는 민주당 신익희(申翼熙) 후보가 유세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무소속 조봉암(曺奉岩) 후보를 쉽게 물리쳤다. 그는 60년 3월 15일 4대 대선 때도 선거운동 기간에 민주당 조병옥(趙炳玉) 후보가 병사, 단독 입후보해 유효투표 총수의 88.7%에 해당하는 963만3천376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4대 대선은 우리 선거사상 악명높은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을 유발, 결국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4.19 혁명으로 60년 대선은 무효 처리됐고, 권력구조가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60년 8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의회에서 실시된 4대 대선에서는 윤보선(尹潽善)후보가 재석 259명(재적 263명) 중 208표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61년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 5대(63년), 6대(67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를 꺾었다. 박 대통령은 그후 71년 4월 27일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돌풍을유효투표의 53.2%에 해당하는 634만2천828표로 간신히 누르고 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박 대통령은 72년 `10월유신'을 단행,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찬반투표식 간접선거로 바꿨으며 이같은 `체육관 선거'를 통해 같은 해 8대, 78년 9대 대통령에 올랐다. `10.26'으로 박 대통령이 피살된 뒤 유신헌법에 따라 79년 12월 6일 실시된 10대 대선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단독입후보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당선됐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최 대통령의 하야로 80년 8월27일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전 대통령은 81년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로 이뤄진 12대 대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 다시 대통령이 됐다.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을 계기로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개헌이 이뤄져 10월 유신이후 16년만에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은 87년 12월16일 13대 대선에서는 `1노3김'이 대결한 끝에 민정당 후보로 나선 노태후(盧泰愚)후보가 유효투표의 36.6%를 얻어 당선됐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후보는 28.0%(633만7천581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611만3천375표),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鍾泌) 후보는 8.1%(182만3천67표)를 각각 얻었다.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후보로 나선 김영삼 대통령은 92년 12월 18일 실시된 14대 대선에서 유효투표의 42.0%를 얻어 당선됐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33.8%(804만1천284표),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16.3%(388만67표)를 얻었다. 97년 12월 18일 치러진 15대 대선에서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천32만6천275표(40.3%)를 얻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투표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뤘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38.7%, 이인제 후보는 19.2%를 얻었다. 오는 12월 19일 치러질 16대 대선은 71년 박정희 대(對) 김대중 후보간 대결 이후 31년만에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간 양강대결 구도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최이락기자 choinal@yonhap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