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한동(李漢東) 전총리는 입법과 사법, 행정 3부의 주요공직을 두루 거친 국정운영 경험과 능력을 최대 전략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청와대가 대통령 연습소가 아니다"라는 이 전 총리의 말은 지지도가 한자릿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용기있게 대선출마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근거다. 이 전 총리는 지난 34년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에서 이정호(李貞鎬)씨와채병숙(蔡秉淑)씨의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포천 청성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 경복중.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대학시절 입주과외를 하며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고학생 생활을 했다. 그는 제10회 고등고시를 치른 뒤 결과를 보지 못한 채 군에 입대, 육군 이등병신분으로 2차 구술시험에 합격, 일약 중위로 진급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포천출신고시합격 1호'이기도 하다. 대위 시절, 대학동기의 소개로 충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숙명여대 대학원에재학중이던 부인 조남숙(趙南淑)씨와 만나 3개월만에 결혼했다.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검사, 특수 1부장, 형사 1부장을 거쳐 검사장 진급을눈 앞에 뒀던 이 전 총리는 81년 1월 청와대 한 비서관으로부터 선거법 개정으로 신설된 연천.포천.가평 지역구의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일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할도 변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고 저서 '가슴이 넓은 남자'에서 술회했다. 그러나 5공 때 여당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은 두고 두고 그에게 부담이 됐다. 그는 "군사독재 시절 정치를 하며 민주주의와 정권의 정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느꼈고 나름대로 민주주의 정착에 기여했다"고 여러차례 해명해야 했다. 그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 정부에서 각 한차례 모두세차례나 원내총무를 맡았다. 6.29 선언과 직선제 개헌, 5공 청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민주화.개혁 입법화와 제도화 등의 현대사 격변기에 총무를 맡으며 대화와 타협을 존중, 여야 의원들로부터 '이한동 총무학'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또 6월 항쟁이후 이해집단의 욕구가 분출되던 88년부터 12월부터 89년 8월까지내무부장관을 맡아 풍산금속과 현대 파업사태를 강경진압하는 뚝심을 보이기도 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표 물망에 올랐다가 민주계의 반발과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대쪽' 이미지에 밀린 데 이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이 후보에게 패했고 결국 대선후 한나라당을 탈당, 자민련 총재로 변신했다. 이와 관련, 그는 최근 한 모임에서 "이회창씨가 사당화를 시도하며 자신과 다른말을 하는 원로들을 집단학살할 움직임을 보여 탈당했다"며 "결국 4.13 총선전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 이기택(李基澤) 신상우(辛相佑) 등 원로를 배제하지 않았느냐.남아 있었다면 내가 '낙천 1호'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자민련이 DJP 공동정권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치른 4.13 총선에서 패배, 공동정권으로 복귀하면서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첫 총리로 도덕성과 자질에 대한 검증을 받았다는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행정.민생 총리로서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DJP 공조와해 과정에서 자민련의 당 복귀 명령을 거부하고총리로 잔류, '철새 정치인, 양지만 바라보는 기회주의자'라는 세간의 혹평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욕먹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며 "인간적 정리만을 따랐다면 엄청난 국정공백과 혼란은 물론, 사흘후 벌어진 미국9.11 테러사태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 전 총리가 과연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지지도와 조직의 열세를 딛고끝까지 대선후보로서 임할 수 있을지,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향후 행보가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추승호기자 chu@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