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 흑흑흑….어유! 흑흑흑…"

30일 평양에 도착,반세기 만에 큰아들 신동길(75)씨를 만난 유두희(100·원주시 문막읍 문막리)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잊은 채 흐느끼기만 했다.

"어머니!저 알아보시겠어요.동길이에요!"

두 사람이 부둥켜안는 바람에 새로 장만한 보청기가 떨어졌지만 유 할머니는 부여안은 아들을 놓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던 유 할머니는 동길씨가 "어머니,며느립니다"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를 만나려고 죽지않고 살아있었지.이제는 죽어도 원이 없다"며 50년의 한을 삭인 유 할머니는 그제서야 "아들 딸은 몇이냐"며 며느리에게 말을 건넸다.

2차 이산가족 방문단중 남북을 통틀어 최고령인 유 할머니는 큰아들의 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아들의 얼굴을 이내 알아보고는 눈물을 훔쳤다.

동길씨는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돼 일본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광복과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4년후인 49년 결혼했다.

그러나 꿈같던 신혼도 잠깐,운명의 여신은 동길씨의 행복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6·25전쟁이 터진 50년 여름날 그는 다시 인민군에 끌려가야 했다.

이렇게 모자는 헤어졌다.

유 할머니는 50년 동안 아들의 결혼사진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왔다.

1남2녀를 두고 있는 동길씨는 "아들(인철씨·45)을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는 바람에 시간을 낼 수 없어 못데리고 왔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가 이렇게 살아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상봉내내 유 할머니 손을 놓지 못했다.

평소 건강한 편이던 유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평양길에 올랐다.

혼자서 20∼30m 정도 걷는데는 무리가 없지만 원체 고령인데다 날씨마저 추워 대한적십자사에서 특별히 배려했다.

/평양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