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의 개혁사령탑이었던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이 2년반 동안의 영욕을 뒤로 한 채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는 공교롭게 급성맹장염으로 입원해 이임식도 못가졌다.

경기고,서울법대를 나와 68년 행시(6회) 수석으로 재무부 관료로 출발했다.

그러나 80년 중도하차하고 미국 유학,대우그룹 임원,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한국신용평가 사장 등을 맴돌았다.

이 장관은 그 때를 ''낭인시절''이라 회고한다.

김용환 의원 등의 천거로 98년초 DJ의 눈에 띄어 초대 금감위원장으로 부활했다.

올초엔 재경부 장관으로 20년만에 ''친정''에 금의환향했다.

그는 낭인시절에 뚝심과 승부사적 기질을 체득했다.

특유의 천재성과 합쳐져 ''준비된 금감위원장''으로 구조조정의 틀을 잡아나갔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장이 움직였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박수를 쳤다.

빚이 80조원인 대우를 정리했고 제일은행을 해외에 팔았으며 3백여 부실금융기관을 퇴출시켰다.

무수한 금융기관 기업의 임직원들을 실업자로 만들거나 감옥에 보내는 악역도 도맡았다.

''금융계의 황제'' ''구조조정의 전도사''라는 별명도 그래서 얻었다.

이 장관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게 평가받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DJ와 ''HunJae Lee''를 믿고 한국에 투자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사전엔 청탁이란 말이 없다.

정치권의 각종 청탁은 아예 듣자마자 잊어버리고 인사로비를 한 금감원의 국장을 팀장으로 강등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적(敵)이 많다.

옛 경제기획원 출신들도 싫어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측근들은 당분간 해외에 나가 살라고 권한다.

한 은행장은 "이 장관은 상황을 꿰뚫는 ''눈''과 이를 알기쉽게 설득하는 ''입''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최근엔 ''대양론(大洋論)''을 내놓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대양론이란 험한 급류에선 모두들 합심해 위기를 넘겼지만 잔잔한 바다로 나오니까 쉬었다 가자며 말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장관은 재경부 장관으로서 7개월 동안 ''실패한 관료''소리를 듣는등 맘고생이 컸다.

총선 등 경제외적인 변수로 할 일도,할 말도 제대로 못했다.

국가채무 논쟁으로 힘이 빠졌고 공적자금 추가조성 문제로 ''말바꾸는 장관''이란 오명을 썼다.

금융개혁을 챙기다보니 매크로(거시경제)가 약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 장관은 막판에 "이젠 시장이 나를 믿지 않는다"고 자책했다.

이 장관은 20년동안 갈고 닦은 실력과 뜻을 다 펴지 못했다.

그는 이임사에서 "구조조정은 연습도 용납되지 않는 진검승부"라고 강조했다.

한 관료는 "오히려 지금 버려져야 나중에 더 크게 쓰일 수 있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 장관은 실컷 골프나 치겠다지만 그를 모셔가려는 국내외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그냥 놔둘지 의문이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