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낙지를 먹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흔히 세발낙지라고 하는 조그만 놈은 다리를 주욱훑은 다음 통째로 입에
넣고 씹어먹는다.

하지만 덩치가 커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거물급 낙지"는 다리를 잘라
머리통에서 분리한 다음 따로따로 먹는다.

잘라진 다리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는 하지만 그 정도 저항이야 손쉽게
진압할 수 있다.

지난주 민주당과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치권의 절묘한 "산낙지 조리법"을
만인의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보였다.

이번 공천은 양당 모두 당내 다수파가 감행한 "친위 쿠데타"였고 그 방법은
"산낙지 조리법"이었다.

우선 민주당은 이번 공천을 통해 비주류를 실질적으로 완벽하게 제거함으로
써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이 되었다.

백설공주는 물론 동교동계요 나머지는 거기 들어가지 못하거나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정대철 이종찬 노무현 김근태 이인제 등 자천타천의 차기 대권주자들은
공천을 받았지만 이들의 계보로 분류되는 이들이 대부분 공천을 받지 못해
머리통만 남은 낙지 꼴이 되었다.

특히 여권이 ''2+알파'' 신당을 추진하던 지난해 여름 알파세력으로서 당내
최대의 비주류 계파를 형성했던 국민정치연구회 소속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상현 씨의 낙천은 동교동계가 아닌 호남출신 정치인들을 머리통 없는
낙지 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동교동계 참모들은 총선 승리보다는 집권 후반기 권력누수
방지를 이번 공천의 지상과제로 삼았던 것 같다.

계보를 형성할 힘이 없는 "386 젊은피"를 대거 내세워 "화장"을 했지만
그런 화장이야 한나라당도 하는 것이니 별 효과는 없을 것이다.

머리통을 남겨두고 다리를 대부분 잘라낸 민주당과 비교할 때 한나라당의
"산낙지 조리법"은 더욱 충격적이다.

다리는 대부분 살려둔 채 머리통에 해당하는 이기택, 김윤환 등 거물급
계파보스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솜씨가 모자라 거칠게 자르다 보니 진통이 커서 저항도 강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이회창 총재가 당을
장악할 수가 없으니 눈 딱 감고 해치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부영 총무가 바람을 잡고 "외부인사"인 홍성우 변호사가 칼을 들었지만
주방장이 이회창 총재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천심사는 애국자들의 토론장이 아니라 적나라한 권력투쟁의 무대다.

국민과 당원의 참여가 봉쇄된 가운데 정당의 실력자들끼리 승부를 겨루는
권력투쟁에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없다.

한때 존경받는 학자이거나 재야 민주인사였던 분들도 이 회오리에 휘말려
들면 거짓말을 밥먹듯 하게 된다.

양당 모두 공천심사위원회의 공식 심사는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열 명 미만의 심사위원들이 1천여 명의 신청자를 심사하는데 면접도 없고
청문절차도 없었다.

중소기업에서 경리직원을 뽑을 때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민주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동교동계 가신들이,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총재와 이부영 총무 등 주류의 실력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 일종의
통과의례로 공천심사위원회를 열었을 뿐이다.

"민주적 과학적 공천"이니 "공천개혁"이니 하는 "아름다운 거짓말"은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선거는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과 같다.

정당들이 내놓은 후보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럼 정답이 없는 객관식 문제를 받았다고 느끼는 유권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이 없다고 항의해도 출제자는 요지부동이고 시험을 거부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없다.

이번엔 낙천낙선운동이지만 다음에는 시민사회가 민주적인 정당 건설을
위한 국민운동을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