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공천정국"이다.

여야 정당의 후보자 공천작업은 과거 우리가 익히 목격했던 풍경을 연출하는
중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는 "하향식 공천"의 비민주성과 폐해를 비판하고 공천제도의
혁신을 요구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공천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고 심사절차가 불투명한 데서 빚어지는 희비극은
하나 둘이 아니다.

공천심사위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낙천 소문이 도는 공천신청자들은
지지자들을 보내 총재실을 점거한다.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날이 새기 무섭게 공천심사위원과 이른바
"실세"들의 집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낙천이 확실한 정치인은 "당내에 나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공천 전망이 불투명하자 탈당을 하거나 당적을 하루아침에 바꿔치우는
정치인도 속출하고 있다.

낙천자들이 중앙당에 몰려와 폭력사태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민주주의 선진국처럼 지역구 후보를 당원들이 선출하는
"상향식 공천"을 할 수 없는가?

안타깝지만 할 수 없다.

그리고 비민주적 하향식 공천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야 정당 지도자들에게
물을 수도 없다.

왜?

우리의 정당 수준이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당정치는 "무늬만 정당정치"다.

정당은 원래 정치적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결사를 말한다.

여기 참여하는 사람들은 당원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의 핵심은
지도자와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권이다.

이런 권리를 누리려면 당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거기에는 당헌당규를 준수하고 당비를 납부할 책임이 포함된다.

어디서나 그렇듯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권리도 없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 정당에 당비를 내는 당원이 있는가?

별로 없다.

주요 정당들은 제각기 수백만의 당원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거의 모두
"서류상의 당원"에 불과하다.

선거철마다 운동원들이 입당원서를 들고 다니면서 밥을 사고 술을 사고
돈을 쥐어주면서 입당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각한 지역당 현상 때문에 여야 정당들은 제각기 특정지역 출신의
"향우회 조직"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물론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들에게만 지역구 후보 선출권을 주는 민주노동당
의 실험은 예외로 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지구당 대의원들도 다르지 않다.

우선 총재가 될 사람이 먼저 지구당 조직책을 임명하고, 조직책은 친인척
이나 고향친구, 학교동창, 심지어는 자기의 가족까지 대의원으로 임명한
다음 창당대회를 열어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이렇게 "선출"된 지구당위원장은 중앙당에 가서 자기를 조직책으로
임명해 준 사람을 총재로 "선출"한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 폐쇄회로라 할만하다.

이런 지구당에서 "상향식 공천"을 한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별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할 경우 현역 지구당위원장들이 모두 후보가 될 터이니 유권자들의
낙천운동은 정말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상향식 공천"은 당장 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밀실공천"은 다르다.

하향식 공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걸 꼭 "밀실"에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컨대 여러 사람이 경합하는 지역에 대해서 공천심사위원회가 공개적인
청문회를 열어 공천신청자의 경력과 자질을 검증할 수는 있다.

이렇게 해서 경쟁력이 없거나 비리 전력이 있거나 무능한 인물을 추려내면
"돈 공천 추문"이나 공천심사위원들의 권한 남용, "실세"들의 월권행위도
봉쇄할 수 있어서 공천후유증이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 사람"을 하나라도 더 공천하려고 하는 정당의 실력자들이 이걸 원치
않으니 말이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