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25일 오전 10시 본회의를 속개,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문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정계 퇴진을
요구한 이용삼의원 등 신한국당의원의 원고내용을 둘러싼 여야간 대립으로
오후 늦게까지 정회에 들어가는 등 진통.

이의원은 사전에 배포한 대정부질문 원고를 통해 "김대중 총재는 88년 8월
간첩 서경원이 밀입북, 북한으로부터 받아온 5만달러중 1만달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이의원은 이어 "근래에는 제2야당의 총재까지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특정지역
을 정치 기반화하고 있다"며 자민련 김총재를 겨냥한뒤 "철저한 지역패권주의
로 가고 있는 두 정치선배는 이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라"고 두 김총재에게 정계 퇴진을 촉구했다.

이에 이날 첫 대정부질문자인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등단한 상황에서 의장
을 중심으로 왼쪽에 포진하고 있던 김옥두 한영애 설훈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들은 일제히 이의원의 원고내용을 문제삼고 수정을 요구했다.

신한국당 서청원 총무는 "총무를 통해 얘기하라"며 고함을 쳤고 국민회의
채영석 의원은 "서총무가 지난 수서사건때 돈받았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맞고함을 쳐 본회의장 분위기는 일순간에 살벌하게 변했다.

국민회의 의원들은 김수한 의장의 거듭된 질서유지 종용에도 불구, 의석에서
일어나 여당측을 향해 "야당 총재를 간첩으로 만들수 있느냐"는 등 고함을
지르며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박상천 총무는 의사진행발언을 얻어 "총재에 대한 공격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한뒤 "검찰이 더 수사해야 할 사항은 언급할수
있지만 검찰수사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을 거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소란이 계속되자 김의장은 두번에 걸쳐 정회를 선포하며 총무간협의를 종용
했고 각당은 고위당직자회의와 긴급의원간담회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다.

국민회의는 긴급의원간담회에서 이의원의 원고내용은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국민회의는 또 신한국당 허대범 의원의 미공개 원고내용에도 김총재의 사상
전력을 거론한 부분이 있다며 같은 결정을 내렸다.

허의원은 이날 오전 취재진에 배포한 자료에서 "정치권내 중요인사의 군경력
과 6.25당시 행적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회의측은 의원들에게 배포된 허의원 질문원고가 "악의적인 내용으로
돼 있고 본래 원고내용에 없는 부분을 신한국당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추가
했다"고 주장했다.

허의원은 공개를 미룬 원고에서 서경원 사건 문익환 목사 밀입북사건, 92년
대선당시 주사파가 포함된 운동권 연합체와의 정책연합, 김일성 조문파문 등
김총재와 관련된 사례 등을 거론하며 불순세력으로 몰았다.

허의원은 또 일본월간지 "정계" 96년 2월호에 실린 김총재에 관한 기사내용
중 "김총재가 6.25전쟁시 공산당원이었고, 당시 체포된 4백50여명과 함께
미 해군함정에서 총살형이 되기 직전 미 해군정보부에 있던 김대중씨의 같은
고향친구 김진하의 조언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부분을 인용한뒤
진위를 가려줄 것으로 촉구했다.

국민회의는 긴급의원간담회를 마친뒤 "이, 허 두의원의 이날 대정부질문서가
신한국당 한 의원 개인차원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와 신한국당, 안기부에 의한
의도적인 매카시 선풍의 신호탄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날 담화에서 "우리 내부에 안보위협요소가 있고 국가
안보를 해치는 어떤 소행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점, 신한국당
서총무가 24일 조홍규, 채영석 의원에게 공개적으로 야당 총재에 대한 전력
시비와 모든 설을 강도높게 제기해 난타전을 보여주겠다고 "선전포고"한
사실 등이 이런 결론의 정황증거로 제시됐다.

국민회의는 또한 이원종 정무수석 강삼재 총장 등 "강경파"가 건재하다는
점을 들어 여권이 매카시즘을 동원한 한보게이트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고도
분석한뒤 "이의원이 지난 14대 보선에서 공천을 받을 때부터 김현철씨의
직계로 알려지고 있다"며 현철씨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같은 국민회의측 시각에 신한국당은 긴급 고위당직자회의를 열고
이의원의 연설원고에 대한 수정과 사과 등 국민회의측 요구를 받아들일수
없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김철 대변인은 "대정부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야당이 원고만 갖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말도 안되며 야당 역시 각종 설을 갖고 발언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고 "이의원도 원고에 대한 수정과 삭제없이 대정부질문을 하겠다
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김의장은 3당 총무를 의장실로 불러 해결책을 찾도록 종용했으나 야당측은
"사과와 수정"을, 여당측은 "발언후의 문제"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아
국회속개 예정시간은 오후 2시 3시 4시 등으로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은 일과성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여당이 작심하고 저지른
일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야당이 현철씨와 대통령에 대해 "루머를 동원해 헐뜯고 있는 이상" 야당
총재에 대해서도 좌시하지 않고 맞대응 한다는게 여당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야당도 이날 두의원의 원고내용을 문제삼지 않을 경우 "여권이 황장엽 비서
입을 빌린 공안선풍으로 야당 말살을 획책할수 있다"고 판단, "비장한 각오"
를 다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조기수습되더라도 대선 정국전개과정에서 돌발적인 사태가
언제든지 벌어질수 있고 이는 여야의 전면전으로 급속히 번질수 있음을 예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허귀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