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황장엽 노동당비서의 망명허용을 시사함에 따라 한.중.북한간에
황비서의 처리문제가 새국면에 접어들었다.

통일원 당국자는 17일 저녁 "북한이 황비서의 망명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며 "중국정부와 벌여온 외교교섭에서 뭔가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말해 북한의 변화움직임을 중시했다.

이는 "북한이 더이상 매달려봤자 이득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게 아닌가 분석"되고 "만약 북한이
계속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둔다면 미국 일본 및 중국에 더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운, 위기상황으로 함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 때문"이라고 이
당국자는 말했다.

또 북한이 올해 김일성 사망 3주기를 마친뒤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이같은 대사를 앞두고 나름대로의 전략이 있어 어쩔
수없이 현실을 수용키로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히 "북한이 그동안 사용해온 "납치"라는 용어와 함께 "망명"이라는
말을 동원한 것은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있다"며 "황비서와 같은 거물급
인사의 신상변화를 더이상 숨길 수없다는 인식을 하게된 것같다"는게
외무부측의 분석.

실제 북한의 이같은 변화는 지난 67년 3월에 발생했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미국망명 사건과 유사한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미.소 냉전대결이 첨예했던 당시, 비동맹권인 인도를 극비리에 여행중이던
스베틀라나는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직전 뉴델리주재 미대사관에 나타나
자신이 스탈린의 딸임을 알리고 망명을 신청했었다.

동서 냉전의 양거두격인 미국과 소련은 즉각 외교전쟁에 돌입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납치했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반발했었다.

그러나 곧이어 스베틀라나가 자의에 의한 망명임을 명백히 밝히고 나서자
소련은 그녀를 CIA로부터 돈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여자로 매도해 버렸고
이로 인해 사태수습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명백한 자유의사를 확인한 이상 더이상 사건에 매달리기 보다는
조속한 사태수습의 길을 선택했던 것.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변절자"의 "한심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소련의 판단덕분에 조기수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무부의 다른 당국자는 "북한의 이번 움직임이 일견 중대한 의미가
있는것 같지만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며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과거 유사한 외교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북한측이 어떤 수순을
밟아 사태를 풀어나갔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명확한 진의는 앞으로 북경에서 전개될 한중, 북중 외교
교섭의 장에서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권부의 판단이 구체적으로 교섭을 통해 가시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시사하고 있는 태도 변화의 조짐이 과연 황비서 사건을 수습하는
단초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같은 변화를 정부가 어떻게 활용, 실질적인
결실을 거두어 낼지 향후 사태 전개방향이 주목된다.

< 이건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