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지난12일 오전 북경의 한국총영사관으로
망명신청한지 몇시간후 남한의 주중대사를 역임했던 황병태의원은 뇌물수수
혐의로 대검중수부로 불려 갔다.

물론 두 사건은 등장인물들이 같은 황씨라는 점만 빼고 전혀 상관이
없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벌어지면서 그 파장은 미묘하게 퍼져나갔다.

이날 국내 신문들은 "황장엽의 망명으로 김정일의 북한이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하는 한편 다른 지면에선 "한때 김영삼대통령의 꾀주머니
였던 황병태의원 등 민주계의 한보사태연루로 김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위기에
직면해있다"고 풀이했다.

남과 북의 집권세력이 짜맞춘듯이 같은 시기에 원인과 형태는 다르지만
위기상황을 맡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난형난제"라는 고사성어가 뇌리를 스친다.

소위 "주체의 나라"라는 북한은 그 철학의 기조를 닦은 황의 망명으로
사상적으로 파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남북대결에서 남쪽의 승리를 축하할 잔치준비만 하면되겠는가.

그러기엔 지금 남의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오죽했으면 남행을 결행한 황장엽까지 남의 상황을 걱정했을까.

황이 망명공작을 벌이는 과정에서 남쪽에 보냈다는 편지를 보면 "남과북의
경제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져 한국이 일본을 따라 잡을
정도가 돼야 평화통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지금 남의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운 것을
보면서 북의 남침야욕을 부추길까 우려된다"는 식으로 충고까지 곁들이고
있다.

황의 말이나 독일통일의 경험을 되뇌지않더라도 남의 현재 정치경제상황은
거덜난 북한까지 짊어지고 통일을 소프트랜딩(연착륙)시키기엔 절대
역부족이다.

민족공동체의 장래가 걱정되는 시점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기엔 시기
상조인 것같다.

북쪽 황의 망명은 주체사상 하나로 버텨온 북한 그 자체의 "끝장"을
상징하지만 남쪽 황의 감옥행은 한 정치계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북은 대안조차 없어보이지만 남은 앞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동우 < 국제1부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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