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검사 = 피고인은 12월6일 12일을 거사일로 최종결정하고 12월11일
조홍장군의 진급사실을 알았는데 11일 조홍의 진급을 자축하기 위해 다음날
저녁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맞나요.

<>.전피고인 = 맞습니다.

<>.채검사 = 피고인은 12일 오후 같은 시각에 30경비단장실로 군장성들을
모아놓은 상황에서 수사총책임자로서 한가하게 진급을 자축하는 자리에
참석할 계획이었나요.

<>.전피고인 = 물론이죠.

수사에 대한 실무적인 총책임은 수사국장에게 있었기 때문에 합수본부장은
가끔 저녁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헌병병과의 장성진급은 2년에 한명씩 진급하기 때문에 정식
발표가 있기전에 미리 결정돼 버리고 그 결정이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본인이 하도 좋아하는 바람에 선배로서 장태완 장군등이 참석했고 나도
선배로서 참석한 것입니다.

당시 조홍이 장소를 결정했고 나는 시간만을 정했습니다.

<>.채검사 = 피고인은 12일 오전 보안사령관실에서 허삼수 피고인등에게
같은날 오후 7시께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여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라고 지시하였지요.

<>.전피고인 = 가급적 협조를 얻어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오라고 지시
했습니다.

<>.채검사 = 당시 허삼수 피고인은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총무국장
으로서 수사와는 무관함에도 불구, 정승화 총장의 연행이라는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긴 이유는 뭡니까.

<>.전피고인 = 사실은 정총장의 세칭 심복이 우경윤이었습니다.

우경윤은 당시 CID대장이었는데 쉽게 말해 검찰의 공안이나 특수부에
해당합니다.

또 허삼수는 빠릿빠릿했고 더구나 수사조정국장이었습니다.

총무국장이라는 말은 잘못된 겁니다.

따라서 수사2국장과 수사조정국장을 보낸 것입니다.

<>.채검사 = 이에따라 허삼수 피고인과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육본헌병대장등은 12일 오후 6시께 합수본부 수사관 7명 경복궁 구내 주둔
수경사 제33헌병대 3개대 병력 60여명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소재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집결시켜 총장공관 경비병등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다음 부대를 인솔, 수소를 이탈하여 총리공관에
도착하였지요.

<>.전피고인 = 상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연행계획만 지시했을 뿐이지 실천에 관한 것은 밑에서 알아서 하는 겁니다.

<>.채검사 = 정승화 총장이 연행을 거부하면서 이재천 수행부관에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 그가
부관실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자 합수부수사관인 김대균 한길성 박원출등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난사하여 상관인 이재천과 김인선 경호장교등을
살해하려 하였다가 머리와 허리등에 부상을 입힌 사실이 있지요.

<>.전피고인 =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부상을 당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채검사 = 이후에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전피고인 =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79년11월24일 계엄확대회의가 끝난후 덕수궁
부근 안가에서 피고인의 생도시절 구대장으로서 평소 잘알고 지내던 피고인
황영시를 만나 정총장을 조사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논한 사실이 있지요.

<>.전피고인 = 안가는 아니었고 시간도 없고해서 보안사령부 사무실에서
황영시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박대통령 시해이후 피도 마르지 않았는데 정승화총장이 김재규가 법정에서
한 진술과 똑같은 내용을 말하는 바람에 장성들이 분노해 회의가 중단된
적이 있다는 말을 황영시가 했습니다.

황영시는 원래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정직한 사람인데 그가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본인에게 야단을 치며 정총장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김부장검사 = 황영시에게 "언젠가 두고 봐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까.

<>.전피고인 = 정총장에 대한 내사얘기는 한적이 있지만 그런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영시가 워낙 순진하고 성격이 대꼬챙이 같아 내사사실을 말해도 말이
새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부장검사 = 그럼 내사 사실은 시인합니까.

<>.전피고인 = 예.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79년12월7일께 보안사령관실에서 피고인 노태우
를 만나 정총장이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
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같은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서
황영시등 다수의 측근장성등이 모이기로 하였지요.

<>.전피고인 = 12월6일 본인 단독으로 정총장 연행을 결심하고 그날
제1수사국장에게 연행세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다음날인 12월7일 노태우로부터 박대통령 시해장소에 있던 정총장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아 군에서 말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태우와는 평생을 통해 아주 친한 친구여서 이날 정총장을 연행조사할
계획이란 말을 했고 수도권 주요 지휘관을 초청, 군의 반대를 수습할 방안이
없겠는지 여부등을 논의했습니다.

그래서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외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도권의
지휘관 10여명을 모은 것입니다.

<>.김부장검사 = 89년11월31일 노태우씨 집권당시 4당합의에 따라 전
피고인이 국회에서 노태우 황영시와 접촉해 군개혁방안에 대한 논의를 증언
했는데 국회증언은 잘못된 것입니까.

<>.전피고인 = 국회증언은 잘못됐습니다.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당시 백담사에서 비서관 한두명과 시간이 촉박한 상태에서 빈약한 재료로
증언문을 작성한뒤 증언 당일 새벽에 백담사에서 일찍 나와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신현확국무총리 내정에 따른 개각 전날인 12.12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그 결과를 개각에 연결
시켜 육군참모총장이 교체되도록 하는등 군 인사에 반영할 의도로 12.12를
거사일로 결정하게된 것이지요.

<>.전피고인 = 아닙니다.

개각문제는 전혀 몰랐고 본인은 놀음은 못하지만 외우기 쉬운 숫자나 짝수
를 좋아합니다.

월남에서도 작전을 하면 4월4일 같은 짝수일을 골랐습니다.

대통령 취임도 3월3일 한것처럼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79년12월7일 피고인의 자택으로 장기오 제5공수
여단장을 불러 정총장 연행조사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12월12일 오후6시까지
30경비단장실로 오라고 했지요.

<>.전피고인 =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같은해 12월초순께 수사실무자인 이학봉피고인과
대공관계에 많은 수사경험이 있는 허삼수피고인과 상의해 정총장 연행을
위해 전체 수사계획을 수립하도록 했지요.

<>.전피고인 = 그렇습니다.

6일께로 기억합니다.

<>.김부장검사 = 이피고인에게 먼저 말을 했습니까, 아니면 동시에 지시
했습니까.

<>.전피고인 = 이피고인에게 먼저 지시했던 것 같습니다.

<>.김부장검사 = 전체 수사계획에 대한 통제.조정은 허화평피고인이 담당
했지요.

<>.전피고인 = 그렇지 않습니다.

허피고인에게는 상당히 늦게 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요한 내용인데 너무 여러사람에게 말하면 누설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허삼수피고인 등에게 정총장을 대통령의 재가
여부와 관계없이 연행하되 정총장이 연행과정에서 순순히 응하지 아니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강제로 연행하라고 지시했지요.

<>.전피고인 = 당일 오후6시30분께 총리공관으로 재가를 받으러 가면서
30분뒤인 오후 7시에는 재가와 관계없이 정총장을 연행하라고 지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력을 사용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김부장검사 = 재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전피고인 = 당시 군여론이나 미국과 일본신문에서 여러차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등 대통령도 그 사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재가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전에 대통령과의 자리에서 수사는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알아서
하라고 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관이 나타나자 곧바로 재가를 해준데에서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김부장검사 = 정총장의 연행에 대응해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헌병감등을 12월12일
당일 만찬초청형식으로 유인한 것은 그들의 부대지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전피고인 = 조홍대령이 헌병에서 혼자 장성으로 진급해 자축연을 열어
달라고 해서 자축연 날짜를 본인이 정해줬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김부장검사 = 노태우피고인등 소위 하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은 그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필요시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전피고인 = 아닙니다.

<>.김부장검사 =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는
정총장을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연행하려고 할 경우 정총장이 피고인 등의 연행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경우 군의 정식 지휘계통이 하극상이라며
병력을 동원해 피고인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전피고인 = 황영시피고인도 진술했듯이 원래 30경비단장실이 아니라
보안사령관실에서 모이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령관실은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30경비단장실로 옮겼던 것입니다.

대부분 그냥 저녁 먹으러 오는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노태우피고인만 그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과도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군통제력이 미미하고 상대적으로
계엄사령관의 권력은 막강하기 때문에 만약 정총장이 연행에 거부할 경우
정부가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당일 장성들이 모이면 정총장의 연행배경과 정당성등을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장성들은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이들은 본인에게 속아서 그날 모이게 된 것입니다.

<>.김부장검사 = 당시 피고인도 정총장이 피고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 장차 피고인의 신상에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나요.

<>.전피고인 =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등은 육본의 정식지휘계통이 정총장의 연행을
강력하게 저지하거나 원상회복을 요구하는등의 돌발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보신책을 세워 놓지 않았습니까.

<>.전피고인 = 보신책을 세워본 일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저것 생각했다면 그같은 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등 30경비단에 모인 지휘관들은 79년12월12일
육본측과 대립할 당시 30경비단 상황실과 보안사 상황실을 통해 입수한
상황을 파악분석하고 필요시 자신들이 지휘하는 부대에 전파하기도 했지요.

<>.전피고인 = 본인은 모르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오후 6시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30경비단 참석자들은 육본측의 병력동원을 저지하면서
필요시 자신들이 지휘하는 부대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수경사령관이나 특전
사령관의 체포등을 지시했지요.

<>.전피고인 = 체포지시를 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사람들이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고 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원래 계획은 보안사령부에서 모이려고 하였으나 30경비
단장실로 집결장소를 변경한 이유는 청와대 경호업무를 담당하는 30경비단은
통신시설이 완비돼있고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워 보안사령부보다 보안유지가
용이하기 때문이었지요.

<>.전피고인 = 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79년 12월초순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에게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들과의 저녁모임을
주선하도록 지시하였지요.

<>.전피고인 = 조홍대령이 장군진급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날짜를 우연히
그렇게 잡았을 뿐입니다.

<>.김부장검사 = 최세장 피고인은 이학봉 피고인으로부터 "정승화총장과
친한 관계에 있는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헌병감등을 일단 연희동 요정
으로 초청하여 부대와 격리시켜 놓은 다음 합수부장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총장을 일단 연행한 후 그전말을 그들에게 이해시켜 그들이 경솔하게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연희동 만찬 모임을 추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전피고인 = 모르겠습니다.

이학봉이 입이 싸서 그런 것 같은데.

우국일 참모장과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 계 속 ...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