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다 감사하다
일단은 부산으로 집결하라고 했다. 거기서 우리는 나가사키와 후쿠오카로 목적지가 나뉘었고 동해를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만났다. 러시아를 횡단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끝없는 여정을 거쳐 마침내 벌목을 비롯한 각종 공사 현장에 투입됐다. 일본과 러시아 간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국제 정세의 흐름은 잘 몰랐다. 그저 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피하고자 하는 기대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삶은 정말이지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살이 찢어질 것 같은 혹독한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 장벽, 인간성이 말살된 노동 조건과 인종 차별, 조선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날마다 추위와 억울함으로 밤을 지새웠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순간, 아내가 나를 황급히 불러 깨웠다. 꿈이었다! 언젠가 봤던 역사 다큐의 한 장면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나의 뇌가 나를 주인공으로 꿈속에 소환한 것이었다. 그런 일을 어떻게 겪었을까, 참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중년의 직원이 그 나이 그대로 훈련소로 재입소하는 꿈을 꿨다는 얘기에 웃었던 생각도 났고,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에서 경험했던 통제와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도 떠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두근대는 심장 사이로 밀려온 깊은 안도감과 한없는 감사함이야말로 그날 새벽에 내가 가졌던 가장 큰 감동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의 소음이 싫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공간을 원했던 이가 극심한 공포에 떨다가 저 멀리서 다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공장의 굉음 소리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대한 감사가 가장 소중한 것 같다. 주방 불을 켜고 기어이 냉장고에 다녀온 아내가 건네주는 물 한 잔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현관을 나서는데 아이가 놓아준 가지런한 구두도 감사하고, 아무 이상 없이 잘 걸리는 차의 시동도 감사하다. 주차장 밖으로 환하게 드러난 햇살도 감사하고, 심지어 나를 멈춰 세운 적색 신호등마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감사하다. 그러니 교정을 아름답게 꾸미는 분들이며, 나의 일정에 도움을 주는 직원들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