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제주 4·3사건'과 김일성
지난 2월 13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4·3사건의 장본인인 김일성 정권에 한때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 의원 셋이 그를 국회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가 “군경 등의 진압으로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란 결론을 내렸는데, 다른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끊임없이 바뀐다.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사회의 가치관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건의 모습이 달라진다. 당연히, 역사적 사건에 관한 논의는 자유로워야 한다.

민주당은 역사적 논의에 윤리와 법의 차원을 도입했다. ‘사상 경찰’ 노릇을 자임한 것이다. 이런 행태는 전체주의적이어서 우리 사회의 건강을 근본적 수준에서 해친다.

게다가 민주당이 내세우는 4·3사건 해석은 국지적이고 편향적이다. 1947년 11월 유엔은 한반도에 자유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러시아는 이 결의를 비난하고 3단계로 대응했다. 1단계는 유엔 대표단의 북한 방문 거부였다. 2단계는 남한 총선 방해였다. 3단계는 남한에서 ‘지하 선거’를 통해 대표자들을 뽑아 북한 정권의 선거에 참여시켜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핵심인 2단계에선 두 가지 공작이 펼쳐졌다. 하나는 남로당을 동원한 무장 폭동인 ‘2·7구국투쟁’이었다. 제주 4·3사건은 2·7구국투쟁의 일부였다.

다른 하나는 ‘남북협상’이었다. 남한 총선거를 거부한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에 초청해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다. 이 공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고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공동 성명서가 나왔다.

4·3사건의 기본 사료는 제주도 남로당 유격대장 이덕구가 지녔던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다. 이 문서는 ‘지서 습격 21회, 개 사망 56명, 개 부상 23명, 개 가족 사망 7명, 반동 사망 223명, 반동 부상 28명, 반동 가족 사망 12명, 반동 가옥 소각 119동, 반동 가옥 파괴 7동, 전선 절단 940건, 도로 파괴 170건’을 전과로 기록했다. (여기서 ‘개’는 경찰을 가리킨다) 이 전과는 남로당 극성기인 1946년의 ‘대구폭동’으로 전국에서 나온 피해들을 훌쩍 넘는다.

필연적으로 미군정 당국과 대한민국 정부도 강경하게 대응했고, 좌익이 한라산에서 유격전을 벌였다는 사정까지 겹쳐 민간인 피해가 컸다. 결국 북제주군 2개 선거구에선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2·7구국투쟁은 제주도에서만 성공했다.

3단계 공작도 성공적이었다. 1948년 7월에 38선을 넘어온 요원들의 주관으로 남한에서 군 단위로 ‘지하 선거’가 실시돼 대표자들이 뽑혔다. 이들이 해주에 모여 남한에 배정된 360명의 대의원을 뽑았다.

4·3사건을 주도한 김달삼은 제주도 대표자들을 데리고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혁혁한 전과 덕분에 그는 박헌영이 주재한 그 대회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대의원에 뽑혔고 국기훈장 2급을 받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이 됐다.

이런 체계적 대응은 북한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테렌티 시티코프 중장이 주도했고 김일성이 실행했다. 김일성은 2·7구국투쟁과 3단계 대응에선 박헌영과 협의했고 남북협상에선 김두봉과 협의했다. 이 어려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김일성은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장악했다. 실제로 이 과업은 그의 오랜 통치에서 가장 성공적인 업적이었다.

이처럼 민주당은 김일성의 가장 큰 업적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듯 당혹스러운 침묵이 이어진다.

이런 희비극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역사적 정설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주요 인물이 숙청되면 어김없이 역사가 새로 쓰이는 광경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