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중삼중으로 대중(對中) 반도체 투자 규제에 나서면서 한국 업체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수출의 40%를 의존하는 최대 시장 중국을 포기할 수도 없어 진퇴양난이다.

앨런 에스테베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 담당 차관은 23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경제안보포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서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1년 유예가 끝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미 정부 당국자가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공장의 공정 제한 가능성을 공개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18㎚(나노미터)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생산 등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는 적용을 1년 유예했다. 중국 시안과 우시에서 낸드플래시와 D램을 제조하는 두 회사가 최신 제품을 만들지 못할 경우 그동안 투자한 50조원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면 10년간 중국 등 ‘우려국’에 첨단 반도체 시설 신설과 추가 투자를 금지한 반도체지원법의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도 문제다. 미 정부는 오는 28일부터 390억달러(약 50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보조금 신청을 받으면서 가드레일의 세부 사항을 내놓을 예정이다. 텍사스주에 170억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 미국에 첨단 패키징 공장 신설을 추진 중인 SK하이닉스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중 기술패권 다툼 속에 탈(脫)중국 필요성이 커졌지만, 반도체의 갑작스러운 중국 생산 중단은 너무 손실이 클 뿐만 아니라 향후 중국 시장 재진입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미국 측에서 최대한의 대중 수출·투자 규제 유예를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정부에 떨어졌다. 민관 네트워크는 물론 수출통제 당국, 외교 채널 등 모든 경로를 가동해 한국 외교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