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신약 기술을 개발하고도 규제에 막힌 홍병희 그래핀스퀘어 대표의 사연은 한국이 왜 ‘스타트업 무덤’으로 불리는지 말해준다. 홍 대표는 ‘꿈의 신소재’ 그래핀을 활용해 치매·파킨슨병 치료제 개발에 나섰지만, 한국엔 가이드라인조차 없어 미국 법인을 통해 임상 연구를 진행 중이다. ‘디지털 기술혁신 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한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한국에서 꿈을 이루게 도와달라”며 손편지를 전달했다.

매년 기발한 아이디어와 신기술로 ‘CES 혁신상’을 휩쓸어온 한국 스타트업들이 정작 국내에선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해외로 떠도는 사연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정권마다 규제 혁파를 신물나게 외쳤는데도 스타트업 혁신의 씨를 말리는 척박한 환경이 그대로라는 게 더 당혹스럽다. 자율주행차 ‘스누버’를 제작한 국내 최고의 자율주행 스타트업(토르드라이버)이 규제를 피해 미국행을 택해 충격을 준 게 2017년의 일이지만, 달라진 건 없다. 뛰어난 의료진과 정보기술(IT) 기반을 갖추고도 원격의료가 불법인 한국에선 유망 신산업인 디지털 헬스케어가 무용지물인 게 대표적이다.

각 분야의 혁신 서비스도 질식당하고 있다. 우버·타다 등을 외면해 벌어진 택시 대란을 보고도 기득권의 편에 선 정치권은 로톡(법률서비스 중개) 택스테크(세무회계) 등 혁신 플랫폼의 날개를 번번이 꺾었다. 아산나눔재단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이 한국에 있었다면 절반 이상인 55개가 온전히 사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가 전기차, 드론·로봇, 바이오헬스 등 각 분야의 신산업 규제를 풀기로 했지만, 문제는 속도다. 융합과 초연결이 특징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엔 한발 앞서 신기술을 확보해 사업화에 성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술 진화와 신산업 출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문가 50명에게 정부의 규제혁신 정책을 물은 설문조사에서도 ‘체감하기 어렵다’(45.5%), ‘속도가 더디다’(27.3%)는 평가가 많았다. ‘규제 혁명’이 적기에 이뤄지지 않으면 혁신 기술과 창의적 기업가정신이 숨 쉴 틈이 없어지고 ‘기술 혁명’도 불가능하다. 홍 대표가 “벤처기업에는 시간이 돈”이라고 하소연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