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소비재기업이 기를 쓰고 해외로 가려는 이유
“지난해는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기업엔 유난히 가혹했어요. 다시 태어나면 B2B(기업 간 거래) 사업만 할 겁니다. 허허.”

한 식품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이 같은 신년 인사를 농담인 듯 건넸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최근 국내 경영 환경을 “살얼음판”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는 최악의 인플레이션 속에 제품 가격을 둘러싼 압박이 거셌다. 상반기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정부는 먼저 소비재 가격 통제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뿐 아니라 기획재정부까지 나서 기업들을 압박했다.

글로벌 원재료값 상승세가 주춤하나 했더니 연말엔 제조사와 유통사 간 제판(제조·판매) 전쟁이 촉발해 지금도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제조사는 CJ제일제당, 판매사는 쿠팡이 각각 선두에서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제판 전쟁은 ‘제한된 소비자 가격’ 안에서 누가 마진을 더 가져가느냐가 쟁점이다. 유통사가 떼어가는 수수료율은 제조사별·제품별로 작년보다 10~20%포인트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사고 후폭풍도 B2B보다 B2C 기업에 더 거세게 불어닥치곤 한다. 사고가 불매운동으로 연결돼 소비자들로부터 응징받는 일이 일상화됐다. 증정품 유해물질 논란에 휩싸인 스타벅스, 공장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한 SPC가 그랬다.

역설적이게도 소비재 기업들을 둘러싼 살얼음판 같은 국내 환경은 해외 사업에 사활을 걸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손경식 CJ그룹 회장, 신동원 농심 회장, 이정애 LG생활건강 사장 등 식품·화장품 기업 CEO들이 올해 신년사에서 일제히 “글로벌”을 외친 데는 이런 함의가 있다. 기업들은 해외 생산기지를 추가로 짓고,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광고까지 내며 사활을 걸고 있다.

때마침 해외 시장에서 기회의 문이 열렸다. 이른바 ‘K열풍’ 덕분에 농수산식품 수출액은 2년 연속 100억달러를 넘어 역대 최대 수준으로 올라섰다.

상대적으로 경기에 덜 민감한 소비재는 글로벌 경기침체 국면에서 전략 수출 품목이 될 수 있다. 자동차, 철강 등의 무역장벽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도 소비재의 강점으로 꼽힌다.

K열풍이 찻잔 속 태풍이 아닌, 한국 경쟁력을 끌어올릴 신성장 동력이 되려면 정부도 총력을 다해 지원해야 한다. 물가를 잡겠다고 기업들을 자꾸 소집하는 구태는 지난해로 족하다. 그 시간에 소비재 수출 지원안을 모색하는 게 국가 경제를 위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