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기업에 내부총질하는 정부 될 건가
“민영화된 공기업이다.” ‘하늘의 물고기’ ‘바닷속 새’처럼 형용모순의 ‘민영화된 공기업’이 21세기 한국에 실재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영권 리스크로 몸살을 앓는 포스코와 KT가 그렇다. 어쩌면 이 나라 정치권력은 민간기업조차 전부 정부 밑에 있다고 여기는지 모른다. 관치 유령이 죽지도 않고 규제를 숙주로 곳곳을 배회하고 있는 실상이 그렇다. 모든 정권이 처음엔 경제를 살리겠다며 규제개혁을 외치지만 전혀 그럴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게 속 편할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본 포스코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꾸렸다고 발표하면서 경영진 책임 문제를 흘렸다. 조사단이 그냥 조사단이 아니란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당에서도 경영진 책임을 언급했다. “당정이 사전에 조율한 것 아니냐” “보이지 않는 윗선과 각본이 있다”는 말이 나돌게 된 이유다.

“태풍이 계속 예보됐기에 대비가 가능했다.” 신통력을 가진 것도 아닌 당정의 판정은 중증의 ‘사후 확증편향’을 보여준다. “3개월 내 정상화 목표”(포스코) “정상화까지 6개월 소요”(정부)라며 티격태격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장면이다. 피해 정도와 복구 속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업으로서는 최대한 빠른 정상화를 목표로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구매업체, 협력업체 등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정부가 기업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굳이 엇박자를 보이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정부가 산업의 공급망 사슬 측면에서 철강 수급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강구할 순수한 목적이라면 공개적으로 조사단 구성을 발표하고 의도를 의심할 만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다. 정부와 포스코가 상호 신뢰 속에서 조용히 진행하면 될 일이다. 불행히도 지금의 상황은 기업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포스코의 특정품목 재고 분량이 어떻다는 둥 글로벌 기업의 내밀한 데이터 공개가 구매처에 미칠 악영향부터 우려스럽다. 온갖 가정을 전제로 한 자동차, 조선 등에 미칠 연쇄 파장 등 불안감을 확산시키는 것도 심각한 자해행위다. 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웃고 있을 이들이 누구겠나. 중국, 일본 등의 경쟁업체들이다. 정부가 기업에 내부 총질을 하고 있는 형국과 다름없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이 국회에서 “포스코 조사의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한 답변을 믿고 싶다. 만에 하나 장관도 모르게 윗선에서 경영진 퇴진이란 각이 짜인 채 벌어지는 일이라면 위험천만하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다. 재난재해를 이유로 민간기업에 경영진 책임 운운하며 정부가 조사한다는 것은 명백한 경영권 침해다. 정권을 뒤흔들 수도 있는 반(反)헌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민간주도 경제’도 새빨간 거짓이 되고 만다.

유능한 정부라면 안에서 폼 잡거나 큰소리치지 않는다. 밖에서 자국 기업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인구 750만 명의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위기관리 능력과 안보전략, 외교력을 바라는 게 아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자국 중심주의 법안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충분히 예견됐다. 정부야말로 무슨 사전 대응책을 강구했는지 묻고 싶다. 한국 정부가 WTO(세계무역기구) 제소를 들먹여도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일본, 유럽의 로비력에는 못 미치더라도 죽을 쑤는 뒷북 통상외교는 아니어야 할 것 아닌가. 기업은 자체 통상대응팀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산업정책을 진두지휘하며 글로벌 기업을 줄 세우는 상황에서 무력한 정부에 기대느니 자구책을 강구해서라도 각자도생하겠다는 얘기다.

산업부가 포스코 조사단을 어떤 법적 근거에서 꾸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막강한 규제를 등에 업고 기업에 군림하는 고용노동부, 환경부를 따라 하지 말길 바란다.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부처가 없다. 앞 정부와 싸우는 감사원, 검찰 등에 불려다니면서 복지부동이 최고가 돼버린 분위기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더라도 한 부처 정도는 강대국 간 지정학적 충돌 속에서 공급망 재편과 에너지 불안, 금융 불확실성의 끝이 무엇일지, 생존을 위한 기업의 대이동에 따라 향후 한국 산업의 지형과 가치사슬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