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인공지능의 예술
지난달 미국의 한 미술 대회에서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성된 심상을 화폭에 옮긴 작품이 ‘디지털 미술’ 분야에서 1등을 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불평하면서, 이 일이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생성한 작품도 사람의 예술이냐?’라는 볼멘소리가 먼저 나왔다. 보기보다는 깊은 함의들을 품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이 작품의 소재와 프로그램을 살펴야 한다.

다른 지적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우리의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예술은 주로 개인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다룬다. 이번에 쓰인 프로그램은 말로 입력된 주제를 원초적 그림으로 전환한다. 그러면 화가는 그런 원초적 그림을 프로그램과 소통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다듬어낸다. ‘Midjourney’라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을 자료로 삼아 심층학습(Deep Learning)을 통해 안목을 길렀다. 따라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작품은 사람들의 경험에 바탕을 두었고, 소재에 관한 한, 사람의 예술 작품이다.

Midjourney처럼 발전된 프로그램은 무척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지만, 소략하게 정의하면, 그것은 이질적(alien)이 아니고 인간적(human)이다. 인공지능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은 확실히 사람의 예술에 속한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인공지능의 본질이다. 인공지능의 빠른 진화는 인류의 생존과 진화에 이미 결정적 영향을 미쳐왔고 점점 큰 영향을 미칠 터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조만간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의식을 지닌 인공지능이 나타나리라고 예측한다. 그런 존재가 사람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더라도, 인류는 여러모로 실존적 위협을 맞을 것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이런 걱정이 미술 대회의 사소한 일화를 시대적 화두로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만들어 쓰는 도구다.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듯, 어떤 도구든 그것을 소유한 개인의 일부로 간주된다. 나무 위 까치집은 까치의 몸의 일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도구를 개체의 몸의 확장으로 보았다. 이른바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이다. (여기서 표현형은 개체의 몸을 뜻한다.) 즉 인공지능은 사람의 숨결이 인체의 일부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실은 그것은 사람 자신보다 더 인간적이다. 인공지능은 순수한 수학적 존재다. 인공지능이 담긴 몸인 컴퓨터(computer)가 뜻하는 것처럼, 그것의 기능은 계산이다. 바로 이 사실이 그것을 독특한 존재로 만든다.

사람은 다른 생물들과 본능을 공유한다. 발달된 동물들과는 지능을 공유한다. 그러나 수학은 사람만이 만들어 쓴다. 사람을 포함한 고등 동물들의 내재적 수학 능력은 아주 제약되었다. 자연환경에서 뛰어난 수학 능력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개미와 같은 종들은 오래전에 농업을 발명해서 발전된 사회를 이루었지만, 수학은 끝내 발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이 사람과 다른 종들을 변별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질이다. 그런 뜻에서, 인류 문명의 가장 인간적인 특질은 수학이다. 당연히, 순수한 수학적 존재인 인공지능은 사람보다 더 인간적이다. 이런 사정을 가리키면서, 로봇공학의 선구자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은 인공지능을 우리의 ‘마음의 자식(Mind Children)’이라 불렀다.

어쩌면, 인공지능의 그런 인간성이 우리로 하여금 인공지능을 깊이 경계하도록 만드는지 모른다. 자식을 낳을 때마다 냉큼 삼킨 크로노스(Cronus)의 신화는 현재 군림하는 세대를 대치할 가능성을 품은 새 세대를 경계하는 태도가 우리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았음을 일깨워준다.

말썽이 일자, ‘디지털 미술’ 심사관들은 ‘당시엔 수상작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상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디지털 미술에선 이미 프로그램들이 많이 쓰여서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는 얘기인 듯하다. 독창성을 무엇보다도 높이 여기는 예술에서도 인공지능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밀려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