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하이에크가 나토의 중요성 역설한 이유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로 인한 경제난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거대담론의 이슈가 요동치고 있다. 무역의 자유와 세계화는 평화를 보장한다는 유서 깊은 논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업이 평화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에 관한 견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권력분립으로 유명한 17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의 영향이 크다. 교역 관계에 있는 두 나라는 서로 의존하게 된다는 견해로부터 경제성장의 국내 정치적 귀결을 도출했다. 성장과 경제적 확대에 관한 관심은 대외적으로도 지배자의 행동을 억제한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무역의 평화론은 결함이 너무 많다. 우선 평화론을 반박할 역사적 사례가 차고 넘친다. 러시아와 중국이 세계화를 통해 이룬 경제적 성취를 바탕으로 냉전 이후의 평화 체제를 무너뜨렸다는 지적도 있다. 거대한 상업 국가였던 네덜란드와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도 빈번히 전쟁에 호소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알렉산더 해밀턴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예를 들어 전쟁의 배후에는 상업적 동기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무역의 평화론에는 전쟁, 갈등, 적대감을 근절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전제는 집권층은 무역이 평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지식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해 사심을 버리고 헌신하는 이타심에서 행동한다는 인성에 대한 낙관주의다. 이는 데카르트, 홉스, 칸트의 합리주의의 소산인 프랑스 계몽주의 전형이다. 이에 속하는 게 인간은 이상사회를 계획할 수 있다는 설계주의다.

그러나 집권층을 비롯해 모든 인간이 지닌 이성의 힘은 제한돼 있고 인간은 천사가 아니라는 현실주의적 견해에서 출발하는 게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하이에크 등 스코틀랜드 전통의 자유주의가 아니던가! 집권층의 이기심과 야심 그리고 지식의 문제 때문에 영구 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역이 평화를 불러온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없었다. 데이비드 흄은 무역과 상업은 번영의 원천이지만 번영은 군사적 기술 개발을 촉진한다고 했다. 타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다. 무역을 통해 부가 축적되면 전쟁의 상대적 비용이 낮아져 전쟁 비용을 조달할 능력과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전쟁에 이용해 그들의 시장을 넓힐 의욕도 증가시켜준다는 게 스미스의 날카로운 인식이었다. 중국이 세계화의 물결에 힘입어 부를 누리게 되자 대외관계에서 호전적으로 변화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역 확대는 필요하지만,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게 자유주의의 국제관계에 관한 인식이다.

그러함에도 무역이 평화를 부른다는 인식이 스미스 전통의 자유주의의 산물로 알려진 이유가 흥미롭다. 19세기 전반 곡물에 대한 관세 철폐와 일반적으로 자유무역을 옹호하기 위해 스미스 전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리처드 콥덴, 제레미 벤담이 스미스를 소환해 이용했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불식하기 위해 그 엉터리 평화론을 우파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역이 평화를 불러온다는 건 매우 큰 도덕적인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쟁과 갈등은 결함이 많은 인성의 불가피한 특성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전쟁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다. 자유주의자들이 중시한 것은 국가 간 힘의 균형이지 무역이 아니었다. 국제 질서가 ‘자생적 질서’인 이유도 힘의 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힘의 균형을 달성할 수 없는 때에 필요한 건 동맹이다. 하이에크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유다.

인간은 삶에서 도전과 기회들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을 때만 최선을 다한다. 자유주의가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다. 국제노동기구(ILO), 국제통화기금(IMF), 중앙집권적인 유럽연합(EU), 유럽의 통화통합, 윌슨의 국제연맹 등을 자유주의가 반대하는 이유도 국제 질서에서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