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벤처 성장 사다리 '특허' 무효화 막으려면…
2020년 세계 최초 코로나19 치료제 ‘렘데시비르’를 개발한 길리어드사이언스는 일반인에겐 생소한 기업이다. 그러나 제약업계에서 길리어드는 설립 35년 만에 연매출 28조원, 세계 10위권 제약회사로 초고속 성장한 벤처회사로 유명하다. 길리어드의 또 다른 대표작은 2009년 신종플루를 잠재운 치료제 ‘타미플루’다. 길리어드는 1997년 계약금 5억달러, 매출의 22%를 받는 조건으로 타미플루 특허를 로슈에 이전했다. 길리어드는 특허 로열티를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해 에이즈와 C형 간염 치료제 등을 연이어 개발하며 글로벌 제약회사로 우뚝 섰다.

특허업계에서 길리어드는 역사적인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016년 특허침해 배상금 3조1000억원을 지급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역대 최고의 특허침해 손해배상금이다. 미국에서 기술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문화로 정착한 이면에는 이처럼 남의 기술을 훔치거나 베끼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사회적 장치가 있다. 미국에서는 벤처기업 기술이 탈취당했다는 뉴스를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기술 보호의 첫걸음인 특허는 중소·벤처기업에 어떤 의미인가? 특허는 우수한 기술에 대한 국가 인증, 기술 금융의 담보일 뿐 아니라 기술 탈취에 대항해 자신의 기술을 시장에서 보호하는 방어막이기도 하다. 이런 기술 보호는 안정적인 기업 활동으로 이어져 우수 특허를 가진 스타트업은 매출이 79%, 고용이 54% 늘어난다는 2017년 미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대기업은 특허 외에 자금력, 유통망 등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통해 자신의 사업을 보호할 수 있으나 중소·벤처기업에는 특허가 유일한 법적 보호 수단인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우리 중소·벤처기업들이 특허 확보에 힘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개인 등의 특허 신청 비중은 58%로 미국, 유럽이 약 20%(2020년 기준)인 것에 비해 2배 이상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주요국들의 특허 신청이 감소했지만 우리나라만 유독 늘었다.

안타깝게도 중소·벤처기업의 성장 사다리이자 버팀목이 돼야 할 특허가 쉽게 무효가 되고 있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특허 무효율은 43%로 미국(22%), 일본(24%)의 약 2배다. 기술 보호, 기술 금융, 기술 거래 모두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특허 생산은 일종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캐는 연구개발(R&D) 단계와 그 원석을 가공하는 특허심사 단계로 이뤄진다. 쉽게 무효화되지 않는 강한 특허를 위해서는 우수한 원석 못지않게 원석을 잘 가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허심사 환경은 주요국보다 매우 열악하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심사관의 1인당 심사 건수는 206건으로 미국의 3배, 유럽의 4배에 이른다.

기술이 한 기업의 성장뿐 아니라 경제 안보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특허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런 특허는 벤처기업엔 생존 문제로 신속하고 정확한 심사가 필요하다. 강한 특허를 위해선 주요국 수준의 특허심사 인력이 필요하다. 주요국은 신속·정확한 특허심사를 위해 심사 인력을 대폭 증원하는 추세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산업계 퇴직 인력을 심사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강한 특허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