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논점과 관점] 층간소음 비극, 모두가 가해자다
‘귀트임’이란 게 있다.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층간소음에 노출되다 보면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이다. 귀트임이 시작되면 약도 없다. 소음이 머릿속, 뼛속까지 파고들며 괴롭힌다. 정소현의 《가해자들》(2021)은 귀트임으로 고통받던 아파트 주민이 이웃들을 어떻게 괴롭히고, 궁극엔 자신까지 파멸로 내모는지를 실감 나게 그린 소설이다. 결말은 아파트 주민 간 칼부림 살인 사건이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아수라장이다. 층간소음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엔 기상천외한 보복 경험담은 기본이고 “가족을 몰살시켜 버리겠다”는 살벌한 경고까지 예사다. 말뿐이 아니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주먹다짐과 칼부림, 살인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다. 언론에 보도된 층간소음 살인 사건만 매년 3~7건이다. 한국은 ‘층간소음 지옥’이 된 지 오래다. 층간소음 비극을 다룬 영화와 소설이 최근 붐을 이루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건설사·정부·정치권도 책임

층간소음 분쟁엔 이유가 있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5183만 명(2148만 가구·2020년 기준) 중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한다. 다세대와 연립주택까지 합하면 10명 중 7명이 공동주택에 사는 셈이다. 공동주택은 천장과 바닥, 벽을 누군가와 공유한다. 소음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발꿈치 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 등이 사각 벽을 타고 아래층과 옆집 등으로 그대로 전달된다. 아무리 이웃 간에 서로 인사하고 지내도, 슬리퍼 착용 등 거주 매너를 지켜도 미봉책일 뿐이다.

우선 집부터 제대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부실 시공이 태반이다. 2019년 감사원이 입주 직전 28개 공공·민간 아파트 191가구를 무작위로 뽑아 조사해보니 60%가 층간소음 기준에 미달했다. 기준에 맞춰 지었다고 신고했으나 거짓이었다. 층간소음 문제만 20년 넘게 연구해 온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장은 “건설사들이 층간소음 없는 아파트라고 허위·과장 광고하고 있지만 기준에 맞춰 지은 집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코로나 집콕’까지 더해져 지난해 층간소음 민원 건수는 4만2250건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 대비 60% 늘었다. 올해도 작년보다 더 증가할 전망이다. 아파트마다 층간소음관리위원회를 두고 자율 조정하게 한다지만 분쟁 해결엔 역부족이다.

대선 공약으로 해법 내보라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수수방관이다. 국토교통부는 2004년 만든 층간소음 기준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다. 건설사들이 층간소음 기준에 맞게 지었는지 사후 인증도 안 한다. 전국에서 층간소음 민원을 접수하는 환경부 담당조직(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 인원은 45명에 불과하다. 분쟁 조정을 신청해도 일러야 두 달 뒤 현장조사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층간소음 분쟁 관련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관련 법을 만들어야 할 정치권은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꿈쩍도 안 한다. 그러고도 문제만 생기면 경찰에만 늦장 출동했느니, 살인 현장에서 이탈했느니 삿대질이다. 두꺼운 낯에 염치도 없다.

층간소음 문제엔 가해자가 따로 없다. 아파트 주민들은 1층을 빼면 누구나 누군가의 위층 사람으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층간소음 비극을 수수방관한 건설사와 정부, 정치권 역시 책임이 무겁다. 국민 대다수가 골치를 앓지만 뾰족한 해법이 없다.

마침 대선 시즌이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상대방 인신공격 거리만 찾을 게 아니라 층간소음 해법을 내보면 어떨까. 획기적 아이디어라면 유권자 70%를 잠재적 지지자로 만들 수 있는 블루오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