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진의 숫자로 보는 세상] 'ESG 정책' 과감함보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지난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대한 것을 재무제표의 주석으로 넣고, 정식 기재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미 기업들은 ESG로 인해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지난 1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ESG 정보공개 의무화 조사’에 따르면, ESG 공시의 컨설팅 및 인증비용으로 연간 1억원 이상을 지출한 기업이 응답 기업의 절반이었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 기업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관련 비용이 평균 9299만원에 달했다. 더욱이 ESG를 재무제표에 담는 것은 공시 이상의 무거운 문제다. 주석으로만 기재되더라도 회계감사의 대상이고, 의도적 왜곡뿐만 아니라 단순 오류로도 징계와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ESG 내용을 재무제표에 정식 기재하는 것은 측정의 신뢰성 및 현행 회계개념과의 상충 등 회계학적으로도 해결할 문제들이 많다. 그래서 금감원장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ESG의 재무제표 도입은 장기전이 될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고 무조건 미룰 수만은 없다. 현행 재무제표가 기업의 무형가치를 제대로 담지 못해 기업가치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 지 오래인데, 이제는 전통 재무제표로는 기업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지적까지 있다. 실제로 장기투자를 하는 연기금 투자자는 이미 ESG를 고려해 기업의 존속을 판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ESG의 재무제표 도입을 무조건 외면할 경우, 자본시장에서 재무제표의 존재 필요성은 사라질 것이다. 지난달 국제회계기준재단(IFRS Foundation)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외에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를 설립해 환경·기후 등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ESG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기업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이다. ESG 주도국인 유럽에서 ESG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을 경제적 이익의 창출 주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은 영국 국립 아카데미의 ‘목적 있는 사업원칙’ 보고서에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콜린 메이어 옥스퍼드대 교수는 “기업은 소유주나 사업주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즉, 기업의 목적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안을 생산하는 것이다. 다만, 박애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수익성 있는 일을 한다는 냉철한 사업적 의미에서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정부는 ESG 규제 생산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ESG 정책을 정부가 너무 앞서 나서는 것은 공보다 과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주도할 경우 정책의 속도는 높겠지만, 기업의 비용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국제회계기준 도입 초기에 환율회계기준으로 인해 조선업계의 부채 급증을 경험했고, 최근에는 리스회계기준 변경으로 해운업이 물류대란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2023년 신보험회계기준 도입에 따른 보험업계의 과제는 아직 진행 중이다.

반면에 기업은 ESG에 대해 선언적 수준에 머물지 말고 재무제표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관리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의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다”라는 주창처럼, ESG에 대한 측정과 관리가 기업의 존속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가령 이진성 롯데푸드 대표는 ‘2022 식품외식산업 전망대회’에서 프랑스 최대 식품기업 다논(Danone)이 사회적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해 재무적 성과와 ESG의 균형 있는 경영에 실패하며 기업가치가 급감한 사례를 발표했다. 반면에 코카콜라는 친환경 냉장고 개발로 에너지 효율이 연간 35%가량 향상됐고, ESG 경영을 통해 비용절감과 경쟁우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ESG를 재무제표에 담는 것이나 공시 의무화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기보다 기업과 시장이 주도하는 장을 마련해 주고, 기업은 이를 진정성 있게 자발적으로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정책은 과감함보다 신중함이 필요하고, 경영은 최적 해법을 기다리기보다 적시의 대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