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내 탓이오"로 역사 바로 세워야 한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조선 백성을 괴롭힌 외적은 왜군(일본군)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돕겠다며 참전한 명나라(중국) 군인들의 횡포도 못지않았다. 한술 더 뜨는 경우도 많았다. “명나라 장수가 한강 백사장에 당도했을 때, 영접 나온 역참 책임자가 빨리 뱃전에 엎드려 인간 디딤판이 되지 않았다고 목에 밧줄을 묶고 개 끌 듯 조리를 돌렸다.”(송복, 위대한 만남) 이 정도는 약과였다. 명나라 군인들의 전선(戰線) 주변 횡포가 하도 극심해 조선 백성이 왜군 진지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백성들 사이에 “왜적이 해를 끼친 것은 얼레빗(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과 같고, 명나라 군사가 해를 끼친 것은 참빗(빗살이 아주 가늘고 촘촘한 빗)과 같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420여 년 전 일을 끄집어낸 것은 “그것 봐라, 일본보다 중국이 더 나빴다” 따위의 어설픈 반중(反中)정서를 부추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할 때 어떤 참상이 어디까지 벌어지는지를 뼛속 깊이 새기자는 것이다. 조선 조정(정부)이 왜군의 침략 징후에 눈감고 나라를 내팽개친 대가는 1000만 백성의 끔찍한 희생과 수탈로 치러졌다. 이렇게 제 구실 못하는 나라가 종주국 명나라엔들 제대로 보일 리 만무했다. 명군(明軍)의 온갖 행패는 그 귀결이었다. 임진왜란에서 뼈아프게 새겨야 할 교훈은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흉악한 왜놈들’ ‘못된 중국인들’을 욕하고,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그들에게 부역했던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1945년 이 땅이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뒤 벌어진 일도 똑같은 교훈을 남겼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상점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다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총검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보다 못해 어린 청소년들이 들고일어난 게 신의주 학생의거였지만, 무자비한 학살로 끝맺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해방군이 왔다고 모두들 플래카드를 만들어 영접했는데, 해방돼도 힘없는 민족은 여전히 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에 절망을 느끼며 울면서 내려왔다.”(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대한민국 광복회장이란 사람이 이런 역사에 눈감고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이라는 강의를 하는 나라가 됐지만, 가장 먼저 곱씹어야 할 화두(話頭)가 안병무 교수의 회고에 담겨 있다. “힘없는 민족은 당할 수밖에 없다”는 통한의 절규를 새겨듣지 않고 ‘외세 탓’부터 늘어놓는 것은 철없고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점에서 여당 대통령 후보가 미국 정치인에게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투정부린 것은 여러모로 부적절했다. 정식 협약이 실제로 존재했느냐 여부를 떠나, 조선 왕조가 일본 식민지배로 넘어가기까지 근본 요인을 먼저 성찰하는 게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조선 말기 국왕 고종을 비롯한 조정이 무기력을 넘어 얼마나 무책임하게 국정을 농단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몰려오는 외세에 현명하게 대처하기는커녕 어느 나라 품에 안길지를 저울질하다가 러시아에 스스로 볼모로 잡히더니, 끝내 일본에 통치권을 넘겨준 게 한일합병 전말의 핵심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 촛불인 상황에서도 조정은 갖은 세금 징수와 매관매직을 통해 왕실과 측근들의 곳간을 채우기에 바빴다. 조선 왕조의 학정(虐政)과 횡포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고종 자신이 훗날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로 보냈던 이위종의 현지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조선 백성은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했다. 그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하고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오영섭,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역사 해석의 올바름에 대한 논란을 떠나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나(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를 먼저 살피고 돌아보는 게 제대로 된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자세일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 탓’부터 하는 나라와 국민의 앞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